정상을 향해 비단을 펼친 듯 휘감아 놓은 안개가 요산의 신비를 더해주고 산모퉁이를 돌 때마다 마주치는 투박스러운 도로는 연극무대의 커튼처럼 감춰둔 비경들을 한 꺼풀씩 벗겨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상반되게 밝은 얼굴을 태운 전동카트가 젖은 낙엽을 밟고 비탈길을 돌아 힘차게 올랐다.
“참 사연도 많겠구나!”라는 생각이 싸구려 투명우비 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가을비와 함께 행복이 조용히 흐른다.
비 내리는 아침
기어같이 맞물려 시계처럼 돌고 있는 세상, 매일매일 그러하듯 평범한 일상의 지극히 고요한 날이다. 하지만 그런 바쁜 일상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들만의 세상나들이에 분주했다.
서울에서는 중앙회장님께서 십 분이 멀다 하고 “출발은 했느냐? 사람은 다 왔는가? 차 밀리기 전에 출발해야 한다.”라며 수화기 저편에 어떤 표정을 하고 계시는지 알 수 있을 만큼의 초조함과 노파심이 출발지인 구미까지 전파를 탔다.
하필이면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평소 휑하던 출발장소 주차장이 행사관계로 차를 이리저리 구겨 넣어도 모자랐는지 엉덩이만 삐죽 내민 차도 보였다.
마지막으로 **지회 실장이 멀리까지 가서 주차를 하고 왔는지 헐레벌떡 뛰어 와 자리에 앉으며 빈자리를 채우자 큰 도로에 대기 중이던 공항리무진이 기다렸다는 듯 바쁘게 출발했다. 급한 마음에 버스를 돌려 출발을 하려는데 오는 차들이 많아 마음이 더 답답했다. 그러던 중 옆에 멀뚱히 서있던 경찰이 교통정리를 안 해서 우리가 늦는다고 괜스레 욕을 먹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마음은 공항으로 가고 있었다.
2호차에 탑승했던 여행사 사장이 휴게소에서 1호차로 허둥지둥 달려왔다. 2호차에 탄 협회 식구들이 여행사에서 버스에 음료랑 먹을 것을 준비 안 했다고 핀잔을 줘서 공항리무진에 그런 것은 원래 비치를 하지 않으며 그렇게 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하였지만 막무가내로 혼이 났다며 휴게소에서 커피와 음료를 구시렁대며 사러 갔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얼어붙은 얼굴근육이 적잖이 당황하였음을 알려줬다.
알록달록한 여행가방과 소중한 물건이 가득 들어 있음 직한 시골어머니의 보따리 같은 것들이 하나, 둘 버스에서 쏟아져 나왔다. 고쟁이 쌈짓돈을 털어 난생처음 외국으로 가는 길이니 그 길이 어디 보통길인가? 비장애인들이야 먹고 싶으면 가서 먹고 자고 싶으면 방 잡아서 자면 되지만 장애인들은 어디를 가든 맛과 편함을 떠나 제일 먼저 휠체어가 갈 수 있는 곳인지부터 확인을 해야 한다. 10센티의 턱 높이가 이렇게 이동에 장애가 될지 상상도 못 한 채 평범한 삶을 살았던 중도 장애인들.......
중도장애인들이 대문을 나서는데 보통 3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하늘은 나를 버렸나? 많은 것들이 떠나가고 살아온 인생의 8할에 가까운 것들이 변화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분노 절망....... 그리고 한국**장애인협회와의 만남.
우린 그렇게 다가온 새로운 인연들과 새로운 추억 만들기에 나섰다.
벌써부터 아니 인천공항이 생길 적부터 그 자리에 계셨을법한 존재감으로 중앙회장님께서 우리 일행을 맞아 주셨다. 하지만 행여 마음이라도 들킬까 심드렁한 얼굴로 “왔냐? 일찍 좀 출발하라 카이!”라며 우리 일행을 반기셨다. 사람 많은 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우리 협회 식구들 모습이 더욱더 오붓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공항 내 온갖 소리들과 섞여 무슨 소리인지는 잘 파악되지는 않지만 기계작동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딸가닥 스피커에서 수줍게 울려 퍼지며 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 얼굴이 상상되는 청아하고 유창한 영어소리는 우리의 출발을 재촉하는 소리였는지 사람들이 마치 파도에 쓸려 육지를 향하는 모래처럼 출구 쪽으로 함께 밀려갔다.
깨끗한 스카프를 한쪽은 앞으로 한쪽은 뒤로 넘겨 옷맵시가 멋진 항공사 승무원들이 휠체어를 밀며 친절하게 인도했지만, 웃는 얼굴 속에 나름 용쓰는 모습이 겹쳐 내심 안쓰러웠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전부 중국만 가는지 길게 늘어선 줄이 있었지만 1996년 장애인의 날을 기점으로 생긴 장애인먼저 실천운동으로 인해 VIP들이 다니는 통로로 제일 먼저 탑승하는 호사를 누리며 우리는 장도(壯途:중대한 사명이나 장한 뜻을 품고 떠나는 길)에 올랐다.
중국공항에 내리자마자 북한 말투를 사용하는 현지 가이드가 귀중한 물건을 챙겨 실 듯 우리를 버스에 차곡차곡 태우고 여행 첫 시작점인 계림으로 출발했다. 도착하면 물씬 풍길 줄 알았던 이국의 향취는 깜깜한 어둠과 함께 속삭이듯 내리는 보슬비에 묻혀있어 우리 일행은 구경도 못한 채 장거리 이동의 노곤함만 호텔에 눕혔다.
계림 첫날
있는 집이야 김밥, 음료수, 과자등 한 가방 잔뜩 챙겨 애지중지 담아 왔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들은 늘 먹던 도시락에 물통 하나만 딸랑 챙겨 집을 나섰다. 하지만 가방이 찼던 안 찼던 마음만은 구름 위를 걷는 듯 행복했던 어린 시절 소풍 길. 그날이 생각나는 아침이었다.
어제저녁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노곤함으로 자세히 보지 못했던 중국 가이드가 몇 년 동안 알고 지낸 듯 친절한 얼굴로 마이크를 잡았다. 1호차 남자 가이드 2호차 여자가이드 둘은 친남매는 아닌듯한데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왜소한 체구에 조선족 특유의 복장과 말투 때문이리라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고 쉼 없이 떠들며 동네 광고를 하고 있었지만 우리의 시선은 온통 생전 처음 보는 간체(한자 줄임체)로 적혀있는 울긋불긋한 낯선 간판들과 지극히 중국 스런 차림새의 중국인들에게 향해있었다. 난생처음 와본 중국계림이라 마음속으로는 휠체어 여행이 가능할까? 중국은 다니기가 편할까? 걱정이 앞섰지만 그래도 낯선 풍경에 조금은 용기를 가져보는 아침이었다.
이강유람
이강유람
강변에서 작은 모래톱을 지나 겨우 받쳐놓은 철판 한 장이 출렁대며 위태롭게 우리를 배로 인도했기에 순간 분잡한 소음이 불만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무협지에서 한 장면만 금방 뽑아낸 듯 치솟아 있는 산들과 마치 풍경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고요함은 우리네 인생의 굴곡을 눈앞에 펼친 듯 모두 숙연해지고 말았다.
창밖으로 강물과 빗물이 우리를 앞으로 밀어내며 흘렀고 싸구려 필름이 붙어있는 파란 유리창에 내리는 빗방울이 바람의 속도에 맞춰 창문을 가로질렀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 무심했던 우리의 외로움도 그렇게 함께 흘러갔다.
저녁엔 500-700명 정도 수용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몽환이강쇼를 관람했다. 쇼라기보다 서커스에 가까웠던 것 같다. 어릴 적 시장 근처에서 몽골텐트처럼 큰 천막을 쳐놓고 주변을 기웃거리면 동물들의 배설물 냄새가 진동했던 ‘동춘 서커스단’
어떤 친구는 천막사이로 코끼리를 구경을 했다는 둥 누구는 엄마를 따라 직접 가봤다는 둥 하는 소리에 끌려 들어가지는 못하고 주변만 맴돌다 해 질 녘 그냥 집으로 돌아온 기억이 아련했다.
형형색색 조명아래 철로 만든 사각박스 안에서 노란색 옷을 입고 빙글빙글 돌던 어린아이들의 서커스는 훌륭하기보다 오히려 애처로웠다.
꽉 찬 객석에 장애인전용석이 없어서 불편했지만 그 정도 불편이야 늘 겪던 불편함이라 별 불만 없이 통로에 휠체어를 세웠다.
대한민국의 극장은 장애인석이 있기는 하지만 얼마나 형식적인지 배려랍시고 차려놓은 장애인석은 대부분 제일 앞자리라서 화면이 어지러워 볼 수가 없는 자리였다. 차라리 흉내도 안 내고 배려도 하지 않은 중국 극장이 오히려 더 솔직해 보였다.
3일 차
계림에서 양삭으로 1시간 30분 정도 이동한 뒤 소수민족들이 살았다던 세외도원으로 들어갔다. 어제 날씨가 쌀쌀했는지 오늘은 사람들의 옷차림이 사뭇 비장했다. 경상도 말로 단디 준비를 한듯하다.
입장하기 위해 매표소에 늘어선 긴 줄을 보며 걱정했지만 장애인들은 옆으로 바로 들어오란다. 말 그대로 프리패스! 하지만 좋아하기엔 일렀다. 배가 작고 위험해서 휠체어 장애인들은 탑승할 수 없다는 가이드의 말에 모두들 실망감이 역력했다. 하지만 봉긋봉긋 솟아있는 나지막한 산들과 작은 호수를 따라 만들어놓은 나무판자 길은 예쁜 풍경과 곳곳에 준비된 소수민족들의 작은 공연을 구경할 수 있게 해 주어 배를 타지 못한 것에 대한 나름 보상을 받은 듯 즐거웠다.
소수민족들의 옛날 모습을 재현해 놓은 작은 움막엔 날씨가 우중충하여 공연이 지쳤는지 특이한 복장을 한 소수 민족 여남은 명이 관광객이 다가가도 무표정하게 불을 쬐고 앉아 있었다.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들을 보며 오른쪽 주머니 속에서 이쪽저쪽으로 굴러다니며 계속 성가시게 손가락을 괴롭히고 있던 한국 돈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들고는 사진을 같이 찍자며 손짓발짓 하였더니 하나둘 일어나 어느새 회장님을 중심으로 포즈를 잡아 주었다.
휠체어 때문에 배를 못 탄지라 조금은 짜증이 나 계시던 회장님께서 그제야 환히 웃으시며 포즈를 잡고 한 말씀 보태셨다.
“나만 잘 나오면 돼!”
구경을 하던 다른 관광객들도 알아들었는지 한바탕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함께 사진을 찍던 소수민족들도 웃음소리에 흥이 났는지 낭랑한 성대의 울림으로 소수민족 특유의 한이 서려 있는 민요를 한 곡조 뽑아냈다.
호수 위로 그들의 한이 물안개처럼 흘렀다.
서가재래시장 이래서 우리나라 전통시장처럼 그러려니 했는데 넓은 도로에 뿌려진 사람들은 세상 인종을 다 모아 놓은 듯하고 눈에 들어오는 각양각색의 자잘한 조명들은 은하수처럼 거리 위에 매달려있어 이국적 향취를 더했다. 우리나라는 왜 이런 멋진 거리하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몇 날 며칠 계속 내리는 비에 저녁까지 도로가 질척했다. 비는 오고 앞차를 따라 그냥 밀려가듯 도착한 곳은 6000개의 객석을 가진 인상유삼저 공연이었다. 장이모인지 삼모인지 유명한 영화감독이 연출했다는데 내용은 알 수가 없었지만 비가 오는 날인데도 우비까지 입고 앉아 구경하는 관객이 무척 많은 것에 놀랐고 공연하러 나온 연기자들의 숫자에 한 번 더 놀랐다. 난생처음 보는 관경에 눈이 호강을 했다.
인상유삼저
낙타바위
마지막 날이다.
양삭에서 계림으로 이동하여 오바마가 왔다 갔다는 칠성공원의 낙타바위를 구경하고 여독을 풀기 위해 마사지를 받았다. 평범하지 않은 몸을 타인에게 내민다는 것이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었지만 중앙회장님께서 먼저 마사지를 받으러 들어가자 지회장과 다른 일행들이 자의 반 타의 반 따라나섰다.
시간이 지나고 중앙회 감사를 맡고 있는 지회장님께서 중앙회장님께 말했다.
“난생처음 받아봤는데 진짜 좋네요!”
그렇다. 노동자 단체가 저임금 노동자들의 기본 삶을 보장하기 위해 최저임금을 10000원 까지는 올려야 한다며 최대 규모의 집회를 예고하고 평균임금이 9000만 원이 넘는 은행권 노조는 성과급 300%를 주장하며 총파업에 나서고 있지만 환갑 진갑이 벌써 지난 예천 지회장은 고작 만 원짜리 마사지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 마냥 행복해했다.
대륙 특유의 웅장함 보다 세세하고 소소한 볼거리가 있었던 양강사호 야간 유람선을 끝으로 우린 꿈만 같았던 중국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양강사호
지난해 대한민국 국민 중 절반이 해외여행을 했다지만 한국소비자원 설문조사 결과 혼자 이동이 가능한 장애인 10명 중 3명은 지난 3년 동안 국내여행조차 경험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외출조차 어려워 일주일간 동거가족 외 만난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장애인이 여행은 물론 이동자체의 어려움을 이유로 집안에서 재가장애인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는 것은 2019년 현재 장애인 비장애인 구분 없이 국민모두가 잘살아야 한다는 외침 하에 보편적 복지라는 기치를 내건 대한민국 정부가 안고 가야 할 정책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짧은 시간 체험한 휠체어 여행이었지만 우리 모두가 스스로의 복지와 이동권 보장에 앞장선다면 후일 있을 혹은 나중에 오는 장애인들의 복지와 이동으로 인한 사회참여는 조금이나마 나아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