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2017) 봄#3 첫 만남
그 예전 밤바다를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 무작정 모래사장을 걸었다.
여러 사람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란 다수의 무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저마다 각자의 사연과 상념에 젖어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정말 자신의 진실한 감정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표정인지 철저한 계산 뒤에 감춘 거짓 표정인지 알 길이 없어 난 조금 애매한 기분이 들었다. 가방에서 손거울 꺼내 들고 지금 내 표정을 확인하려고 시도했지만 거울의 표면이 눈에 닿는 순간 내 표정은 본래의 날 것이 아닌 꾸며낸 표정으로 바뀐 것 같았다.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는 작은 손거울에서조차 솔직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나는, 아니 나만이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많은 인간이 자기 자신조차 속이려 들 것이다. 나는 어느 일순간에라도 내 감정을 거짓 없이 드러내는 날 것 그대로의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던가. 손거울을 보며 계속 모래사장을 걸었지만 내 표정은 역시나 나만이 볼 수 있는 손거울을 의식해 의도적인 표정을 지어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솔직하지 못한 나는 너를 만났다.
너는 인파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처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너의 오른쪽 측면 얼굴이었다.
한눈에 봐도 훤칠한 키에 마치 내가 오늘 입은 원피스처럼 새하얀 얼굴, 네 맞은편에 있는 사람을 보며 이야기할 때 뺨에 쏙 들어가던 보조개. 무엇보다 상대를 볼 때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눈빛이 내 시선을 끌었다.
너를 처음 본 순간이었다.
그 순간 내 표정을 거울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내 감정을 거짓 없이 드러낸 날 것 그대로의 표정이 내 얼굴에 아주 잠깐이라도 스쳤을 것이라 확신한다.
너는 온통 어두웠다. 짙은 차콜 색상의 니트 목폴라와 검은색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그 무채색이 완벽하게 어울려 오히려 이질감이 들었다. 마치 무채색을 표현해 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 같았다.
난 홀린 듯 네가 가운데에 자리해 있는 인파 근처로 걸어갔다. 무리와 가까워질수록 무리의 사람들은 의아한표정으로 날 보았다.
너의 측면이 아닌 정면을 보기 위해 네 앞에 섰다. 정면에서 정확하게 마주한 네 얼굴은 예상보다 근사했고 정확한 얼굴을 확인하니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했다. 일순간 얼굴의 온도가 확 오름이 느껴졌다. 난 너와 마주친 눈을 잠깐 돌려 주변을 살피고 궁색하지만 뻔한 변명거리를 재빠르게 찾아냈다.
“아는 분인 줄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듯 많은 질문이 귓가에 맴돌았지만 내 신경은 온통 무채색의 너에게 쏠려 그 말들의 최종적인 뜻이 내게 닿지 않았다. 바다의 짠 내음 가운데에서도 너의 향이 느껴졌다. 비 온 뒤 숲에서 느껴지는 시원하고 축축한 향이었다. 무채색의 너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묘한 향에 네가 쓰는 향수가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나는 결국 네 앞에서 적당한 말을 골라내지 못해 실례했다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급하게 자리를 떴다. 내가 먼저 등을 돌려 떠났지만 네가 떠나는 날 조금이라도 신경 쓸지, 어떤 표정으로 내 뒷모습을 볼지 몹시 궁금했다.
네게서 충분히 멀어져 네 시야에서 내가 완벽히 사라졌다고 생각될 때 즈음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사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호흡이 일정하게 뱉어지지 않았다.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왜, 무채색의 당신을 보고 이토록 긴장한 것일까. 왜 나의 등에 미적거림이 남았을까. 이 혼란한 감정의 출처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디든 좋으니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철저히 혼자인 공간에서 방금 느낀 혼란스러운 감정을 되새기고 싶었다.
광안대교가 한눈에 보이는 숙소를 잡았다. 그 호텔은 단언컨대 멋지다-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것들이 멋지다는 단순한 의미뿐만 아니라, 나의 시간을 묶어두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는 곳이다. 분명 처음 묶는 낯선 곳임에도 안락하고 편안했다.
그 호텔의 침대에 앉아 창 너머의 광안대교를 보고 있으면 거짓말처럼 마음이 평온해진다. 어쩌면 나라는 인간을 정의할 수 있는 그 모순적인 감정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려나.
그곳에서 나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마음들에 충돌하지 않는다. 그저 하염없이, 바다라는 자연 위에 인간이 비집고 들어가 만든 큰 대교를 보며 꾸밈없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흐르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다. 그리고 파도를 본다. 아니, 파도를 느낀다. 내 마음의 작은 파도가 다시 일렁이고 있음을 느낀다.
그 파도는 물론 무채색의 너로 인한 움직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