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2017) 가을#3
"오랜만이야."
H에게서 처음으로 진부한 인사를 들었다. 진부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저릿한 그런 인사를 말이다.
"보고 싶었어."
이어지는 말 역시 진부하다.
"나도."
나 역시 심심한 답변을 진심을 다해 전한다.
꽤 오랜만에 마주한 H는 내가 알던 그 보다 조금 더 남자다워졌다.
하얀 도화지 같기만 하던 그의 얼굴은 지난 계절의 흐름을 보여주듯 살짝 까무잡잡해졌다.
늘 즐겨 입던 짜임이 촘촘한 진회색 니트를 입었는데 옷 위로 보이는 체격도 상당히 커져있었다.
너는 어느새 그 어릴 적 말간 소년의 티를 벗고 한 남자가 되는 중이었다.
네가 보는 나는 어떨까.
나는 항상 고수하던 검은 머리를 옅은 갈색으로 염색했고, 앞머리를 내렸다.
너는 무섭도록 빠르게 나의 사소한 변화를 알아챈다.
"머리가 바뀌었네. 예쁘다."
너의 말에 나는 또다시 생각한다.
우리가 함께했던 그 긴 시간은,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던 그 서사는,
모두가 꿈꾸는 청춘을 간직한 행복한 결말이 될 수 있을까.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조금 겁이 난다. 동시에 무채색과 그 시원한 향이 나를 스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 앞의 H를 보기로 한다.
나의 우유부단한 마음이 얼굴 위로 드러났는지, H는 내게 말한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다른 생각은 하지 마. 오늘은 내 생각만 해."
그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놀이공원이었다.
H는 곧장 교복을 대여할 수 있는 상점으로 나를 이끈다.
나는 키가 큰 그의 보폭을 맞추려 빨리 따라갈 필요가 전혀 없다.
그는 늘 내 걸음에 맞춰 한 발 두 발 느리게 걸으니까.
H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중학교 때와 같은 남색 마이 속 흰 셔츠와 회색 바지를 입었다.
탈의실에서 그 애가 나온 순간, 나의 모든 오감이 멈춰 섰다.
세월의 흐름이 옅게 보이는 얼굴 위로 금세 추억이 피어올랐다.
추억은 이제는 꽤 까마득한 그 옛날로 나를 데리고 갔다.
"야, 내 가방 먼저 받아달라니까."
"지금 던져."
우리는 학교에서 도망치기로 했다. 뭐 사소한 일탈 같은 그런 거다.
이유는?
날이 너무 좋아서.
한강 공원에 가서 한낮의 햇살을 정통으로 맞으며 라면을 먹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몰래 담을 넘는 중이다.
치사하기 짝이 없는 그 애는 이미 혼자 담을 넘고서는 낑낑거리고 있는 나를 놀리는 중이다.
"야 바보야. 빨리 넘으라고!"
넘기만 해 봐. 넌 죽었어.
꽤 어려운 사투 끝에 담을 넘었다. 내가 내려오자 그 애는 눈이 반달이 될 만큼 환하게 웃으며 곧장 내게 온다.
그리고는 내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준다.
"씻으면 되는데."
따뜻한 바람이 살랑 불고, 꽃 내음이 그 사이사이 고개를 내민다.
입고 있는 마이가 살짝 버거울 정도로 따뜻한 날이다.
우리는 약속대로 한강 공원에서 라면을 먹는다.
"진짜 급식보다 백 배는 맛있지 않냐?"
그 애는 말을 할 때마다 두 뺨에 보조개가 쏙 들어간다. 한 번 만져보고 싶은데-라는 생각이 들 때면
늘 내 얼굴에 있는 보조개를 만지곤 했다.
"내일 혼나겠다."
조금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는 내게 그 애는 실없는 소리를 한다.
"내가 너 대신 맞을게!"
풀이 무성한 곳에 그 애는 하늘을 정면으로 보고 누웠다.
"너도 누워봐. 앉아서는 안 보이는 것들이 보여."
이 풀밭에 누워야만 보이는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싫어. 교복 더러워지잖아."
"그러면 뭐 어때. 지금을 느끼라고 이 바보야! 지금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
난 끝까지 풀 밭에 눕지 않았다. 그땐 이미 흘러가고 있는 '지금'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 없었으니까.
네 말이 맞아. '지금'은 돌아오지 않아.
하지만 이렇게 다시 교복을 입은 모습을 보는 이 '지금'은 놓치지 않을래.
너는 나의 어제고, 오늘이고, 어쩌면 내가 그려갈 내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무채색의 그 남자는, 그래. 내 영감일 뿐이야.
"좋아해."
나의 폭탄 같은 발언에 H의 모든 회로가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