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2017) 가을#4
그는 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 놀라운 발언을 하고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내 말이 과연 진실이 맞는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H의 얼굴엔 갖가지 아리송한 표정이 뒤섞여 어떤 감정이 가장 주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들어가자."
우리는 그 옛날처럼 교복을 입은 채 어쩌면 동심이 아직 남아있을 놀이 공원으로 향한다.
입장하자마자 맨 처음 보이는 가판에서 갈색 여우 귀 머리띠 하나를 집어 들고는 H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있었다.
H는 보조개가 쏙 파이게 웃음을 지어 보인다.
"뭐, 어떡하라고. 나 이거 쓰라고?"
나도 그에게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H는 하얀 토끼 귀 머리띠를 집어 들어 내 머리 위에 씌웠다.
"그럼 넌 이거 써."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는 교복을 입은 채로 조금 유치한 동물 머리띠를 쓰고
찰나뿐인 동심의 세계를 누빈다.
보통의 평일이라 그런지 놀이공원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요즘에는 교복대여가 유행이다 보니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교복을 착용하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진짜
학생은 단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뭐든 진짜와 '그런 척' 하는 것은 한눈에 보이는 법이다.
타인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아마도, 사랑에 빠진 행복한 연인 같아 보이겠지.
지금 네 손을 잡는다면, 더 이상 '그런 척'이 아닌 진짜 연인이 될 수 있는 걸까.
이상하게 H가 어색했다. 그리고, 간지러웠다.
그의 얼굴 정면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먼저 물어봐줘.
"있잖아."
H는 이제 막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나보다.
"난 늘 지나간 것들이 그리워. 우리 가족도, 내 중고등학교 시절도. 이제는 현재가 아닌 그런 것들 말이야."
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빠져든다.
"그리고,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가."
맞아. 우리의 이 지금도 눈 깜빡하는 사이에 금세 사라질 테지.
H는 문득 먼 곳을 응시하던 시선을 내게로 옮긴다. 그의 눈은 집요하게 나의 눈동자를 따라온다.
"넌 늘 내게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야. 그리고 언제 사라질까 항상 노심초사해. 난 널 사랑하지만, 동시에 네가 너무 미워."
H가 내게 반절 씩 가진 바로 그 감정을 고백하는 순간이었다.
"봐, 너는 지금도 나로 인한 흔들림이 전혀 없어. 그렇지?"
"그래 보여?"
"응."
"아니, 아니야. 난 지금 네 눈을 똑바로 보는 게 힘들어."
H는 허리를 굽혀 자신의 눈과 내 눈의 높이를 거의 정확하게 맞추고는 토끼 귀를 살짝 만졌다.
너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을 쓰다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평생 내 옆에 내가 원하는 형태로 있어줄 수 있어?"
내. 가. 원. 하. 는. 형. 태
H는 그 말을 강조하듯 앞 선 문장 보다 조금 느리게 입 밖으로 뱉어냈다.
나는 대답 대신 조금 전 잠깐 생각했던 행동을 실제로 하기로 결심한다.
너의 머리칼을 만졌다.
아주 천천히 너의 머리칼이 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왔다.
H는 여전히 허리를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춘 채 나를 보고 있다.
머리칼을 만지던 손을 조금 내려 그의 볼에 대었다.
H는 그의 볼을 만지고 있는 내 손 위에 자신의 크고 하얀 손을 다시 얹는다.
"내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해도 돼?"
"응."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너의 목소리만 남는다.
사랑과 증오가 공존한다는 것은 꽤나 불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증오를 다 덮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대개는 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지 않나 싶다.
그의 사랑이 언제 증오로 덮일지 몰라 불안했다.
하지만 또 누군가 그랬던가.
고통과 아픔이 수반되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H는 엄청난 불면에 시달렸다.
"잠든 새에 전부 다 사라질 것만 같아."
그는 잠에 들지 않기 위해 애쓰고, 겨우 선잠에 들어도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다 몇 번씩 깨어나곤 했다.
눈물이 온 베개를 다 적시는 그런 날도 있었다.
그는 늘 이미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난 가족을 꿈속에서 찾아 헤맸다.
H의 세계는 심오했고 여전히 나는 그의 구원이 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팠다. 그의 베개가 온통 눈물로 젖어있을 때는 그의 외로움에 내 마음이 다 시렸다.
H는 내가 자신의 세계에서 불현듯 사라질까 늘 안절부절못했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그가 이 세계에서 말도 없이 사라질까 늘 불안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의 곁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