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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향(向)

너(2017) 겨울#1 마카오

by 리그리지 전하율

난 도저히 그 겨울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H의 향이 내게 닿으면 그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과 별개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말보다 중요한 어떤 것이 있었다. 그의 향은 그가 실재한다는 증거와도 같은 것이다.
언제든 그와 함께 있으면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마음에 바람이 불었다.
H는 내게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였다.


중학교에 갓 입학했을 무렵 그에게 내가 느낀 어떤 감정을 이야기했다. 중학교 시절보다 더 과거인 초등학교 저학년, 참 좋아하던 드라마의 배경지로 마카오를 처음 접했다.
내 눈에 처음 닿은 그곳의 파스텔톤 색감은 단숨에 나를 매료시켰고 처음 느끼는 ‘매료’라는 감정에 난 충격을 받았다.
그날 이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곳에 어떤 그리움, 혹은 향수 같은 묘한 감정을 가졌던 것 같다.
난 어느 날 H에게 그것을 이야기했고 그는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어줬다.
엇비슷한 느낌의 중국 상하이, 베이징 등을 여행한 적은 종종 있었지만
정작 가장 그리워하던 마카오를 여행한 적은 없었다.


“네가 좋아하는 겨울에 내가 좋아하는 가을이 있는 곳에 가고 싶어.”
H가 전역 후 나직이 말했던 그곳은 마카오였다.
홍콩, 마카오의 계절은 국내보다 한 계절 즈음 느려 겨울에 그곳에 가면 가을을 느낄 수 있다.
H는 수많은 계절을 나와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마카오에 함께 가자는 말을 계절에 빗대어 말하는 그를 도저히 뿌리칠 도리는 없었다.


우리는 몹시 추운 겨울날 가을의 따뜻하면서도 쓸쓸한 향이 느껴지는 마카오에 갔다.

화려하고 높은 건물로 가득한 메인 스트리트 저편에는 음식 냄새와 향내가 오묘하게 섞여 마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 드는 골목이 있었다. 마카오의 골목엔 작은 사원이 많았다.
가끔 걸음을 멈추고 사원에서 피어놓은 향 내를 맡을 때면 중학교 시절 처음 느꼈던 묘한 향수를 다시 느꼈다. 난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곳에 있으면서도 그곳을 그리워했다.
우리는 한 손에는 뜨거운 커피 혹은 버블티를 들고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그저 걷고 또 걸었다.
유명한 관광지는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곳들을 피해 관광객의 발길이 드문 민가 골목 사이를 사이를 쏘다녔다.
H는 언제나 뒤에서 내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가끔 뒤처져 걷는 그를 부르기 위해 뒤를 돌아보는 나의 얼굴은 어땠을까.
후에 확인한 H가 카메라에 담은 내 모습은 조금 슬펐다.
그는 이제 내게서 슬픔을 느끼나- 사진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나는 그가 내 옆에서 나란히 걷길 매 순간 바랐다.

"너한테 어떤 말을 하고 싶어."

마카오의 조용한 골목길을 걷다 그는 두서없는 말을 뱉었다.

"무슨 말?"

"그냥, 정말 두서없는 말들이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들을 단어로, 문장으로 나열하고 싶어."

"그래, 조용히 들어볼게."

그는 거의 처음으로 내게서 등을 보이고 앞으로 걸어갔다.

"이렇게 조용한 골목에서 보이는 저 화려한 불빛에 이질감이 들어. 이질감이 들면서도 아름답다고 느껴. 난 내가 좋아하는 것이 이 조용한 골목인지, 고요 속에서 바라보는 화려함인지 모르겠어. 그리고, 우리는 겨울이지만 가을을 지나는 중이지. 계절을 넘나드는 느낌에 조금은 기묘한 느낌이 들어. 마치, 실재하는 곳이 아닌 동화 속 세계 같달까."

H는 정말 두서없는 말들을 꽤 시 적으로 풀어냈다. 그는 잠시 호흡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아니, 동화 속 세계이길 바라는 것 같아. 다시 돌아가면 마치 이곳에서 있었던 모든 순간이 한 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질 것 같아. 너와 함께 마주 보는 것조차 그저 내 꿈의 일부 같아.
하지만 역시, 그런 두려움을 떨쳐내야 너를 계속 내 옆에 둘 수 있겠지?
내가 원하는 형태로 말이야."

내. 가. 원. 하. 는. 형. 태.

난 그 말이 늘 묘하게 거슬렸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야, 아니면 그냥 들어주길 바라는 거야?"

"둘 다야."

"어렵네."

그의 모순적인 마음에 짧은 답변을 하기로 한다.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은, 분명 존재했던 일이야."

우리는 바다를 따라 작은 집들이 모여있는 ‘콜로안 빌리지’에 갔다.
그 마을은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중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너무 고요해서 평온보다 쓸쓸함이 더 크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바다의 짠 내음과 조금 습한 기온이 내 몸에 닿았고 , 나는 그 느낌이 싫지 않아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H는 역시나 그런 나를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이 시간을, 지금을 영원히 잡아두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지 않길 바랐다.
우리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멈추는 상상을 했다.
이곳이 아무리 좋아도 혼자는 싫었다.
그 작은 마을 곳곳을 내가 아는 한 빠짐없이 걸었던 것 같다. 걷고 또 걷다 지치면 어디든 앉아 숨을 골랐다. 길을 걷다 달콤한 빵 냄새를 맡으면 잠시 멈추어 달콤한 디저트를 즐겼다. 꽤 자주 혹은 간간이 들려오는 낯선 언어는 새로운 소리였다. 나는 새로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운율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낯선 언어로 쓰여있는 간판들은 신비로웠고 난 그 언어들과 함께 다시 한번 새로운 모습의 H를 내 마음에 새겼다.
그와 낯선 언어가 즐비한 그 거리는 이질적이지만 한 폭의 그림인 듯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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