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2017) 겨울#2 마카오
우리는 밤이 되면 간판이 없는 조용한 재즈 바에서 위스키를 마셨다.
낯선 곳에서 듣는 익숙한 음악과 독한 술은 내게 여생에 걸쳐 기억할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H는 음악, 그림, 영화 등 예술을 좋아한다.
그는 위스키를 마시며 어떤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서, 우주 한가운데에 홀로 남겨진 주인공은 우주의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껴. 오롯이 혼자라는데에서 온 두려움이 가장 컸고, 그다음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공포감이었지. 난 그 주인공이 너무 안쓰러웠어. 중력도 없는 우주에서 혼자 떠 있을 때 얼마나 두려웠을까."
"마치, 너를 보는 것 같았어?"
H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혹여 괜한 말을 한 것이 아닐지 걱정스럽다.
"아니. 나한테는 네가 있잖아. 난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대화 사이사이에 익숙한 음악이 들려온다. 노라존스의 돈 노 와이다. 정통 재즈 위주의 선곡을 하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한창 연기를 하던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음악이라 자동반사적으로 그때가 떠오른다.
"그럼 내가 없으면 넌 다시 혼자가 되는 거야?"
"글쎄. 그것까진 생각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
내일의 상쾌한 컨디션을 위해 아쉬움을 남기고 마카오의 밤거리로 나온다.
H는 바지주머니에서 하얀색 줄 이어폰을 꺼내 한쪽을 내게 건넸다.
"커피 한 잔 사서, 음악과 함께 정처 없이 걷자.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확실히 그는 낭만과 발맞추어 걷는 사람이다.
지칠 줄도 모르고 몇 시간을 그저 걷고 또 걸었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있는 마카오의 골목길은 어느 누아르 홍콩 영화에서 본 장면 같았다.
"한국에는 지금 눈이 온다더라.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얇은 긴 팔 옷을 입고 있지."
그랬다. H는 검은색 리넨 셔츠와 진회색 슬랙스를 입었고, 나는 꽃무늬가 프린팅 된 얇은 시폰 소재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우리는 겨울에, 가을을 함께 보내고 있는 거야. 올해 가을을 두 번이나 같이 보낸 거지."
H는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는 모습이 좋다. 참 예쁘다고 생각한다.
"잠깐 거기 서 있어."
나는 H를 가로등 아래 세우고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나를 보며 다시 한번 환한 미소를 지었다.
후에, 그 사진을 인화해서 지갑에 넣고 다녔다.
그 사진은 아직도 내 다이어리 한편에 쏙 들어가 있다.
모든 순간이 소중했지만 한 가지, 무척이나 내 마음을 울린 순간이 있다.
H와 난 마카오의 거리 가판대에서 파는 길거리 음식(이름을 모른다)을 먹었다. 카레 베이스의 국물에 여러 가지 재료를 기호에 맞게 고르면 몇 분 내로 완성된 음식을 넓적한 종이컵에 꼬치와 함께 담아주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이름 모를 그 음식을 각자 손에 쥐고 조용한 골목의 벤치에 앉아서 먹었다.
너무 맛있다며 호들갑을 떨며 음식을 먹는데, 대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3명이 자전거를 타며 노는 광경을 동시에 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H도 나도,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그들을 지켜봤다.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는 그날의 소리였다.
나는 조용히 그 아이들을 카메라에 담았고, 몇 년이 흐른 지금도 그 사진을 가끔 꺼내본다.
평온, 평화, 행복의 모든 상징 같은 그 사진을.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그날의 마카오가 생생하다.
그 어떤 진귀한 것을 준다 해도 그날 하루와 맞바꾸진 않을 것이다-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다.
몇 년 전 낭만의 마카오에서, 난 어떤 말도 하지 않고 H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었다.
달콤한 꽃 향이 나는 빛바랜 종이에 조곤조곤 읊조리듯 나의 마음을 한 글자, 한 글자 곱게 눌러쓴 그런 편지를 말이다.
편지의 머리말은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가을을 함께 보낸 너에게. 정도로 쓰면 좋지 않을까.
그와 함께한 마카오 여행은 내 미묘한 그리움 혹은 향수를 더욱 증폭시켰고 난 도저히 그 겨울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