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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향(向)

그녀(2018) 봄#1

by 리그리지 전하율

여느 때와 같이 그저 그런 봄이 될 뻔했는데, 하필 그녀를 만났다.

휴학 후 잠깐 알바(꼭 한 번 해보고 싶었던 방탈출 알바)를 하던 그곳에서, 하필 그녀를 만났다.

왜 하필이라는 표현을 하냐- 물을 수 있겠다.


그녀는 2018의 타이틀을 통째로 거머쥘 정도로 내게 많은 것을 남기고 떠났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떤 형태로, 왜 떠난 것이냐에 대해선 아직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그녀와 나의 인연은 꽤나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녀는, 우선 나보다 세 살 연상이며 공통점이 꽤 있었다.

연기과 휴학 후 진로를 찾고 있다는 것이나 , 술을 즐긴다는 그런 사소한 것들 말이다.


그녀를 처음 본 날 생각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다소 무례하다 느껴졌다. 그렇지만 예뻤다.

새하얀 피부에 얼굴의 반은 차지할 것 같은 큰 눈을 가진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시선이 내내 그녀에게 머물렀다.

하지만 그 괴팍한 여자는 나에게 말했지.

"굉장히 예쁜 년이 왔네."

나도 지지 않는다.

"이하동문이네요."

나의 짤막한 대답에 그녀는 잠시 나를 훑더니, 이내 한 마디 한다.

"맘에 드네."

그녀는 리넨과 코튼이 혼방되어있는 듯한 흰색 얇은 원단의 롱 티셔츠와 베이지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무런 손질을 하지 않은 검은 생머리는 붙임 머리라고 한다.

붙임머리가 꽤나 감쪽같아서 놀랐다. 진짜 머리인 줄 알았어.

그녀는 일을 잘하는 편이었다. 기본적으로 웬만한 것들에 센스가 있고 손이 빨랐다.

비상한 머리와 (알고 보면)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같아 종종 타인과 사소한 문제로 다툼을 벌였다.

나 역시 할 말은 똑 부러지게 하는 성격이었지만 트러블 메이커에 속하는 편은 아니라 그녀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를 크게 부풀리는 재주가 있달까.

나는 그녀와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감정 전개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나는 타인에게 오랫동안 조금씩 스며드는 타입이지만, 그녀는 마치 불도저 같았다.

처음 나를 마음에 둔 이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나와의 거리를 좁히려 시도했다.

그녀가 왜 내가 마음에 들었을까-는 여전히 의문이다.


같이 일한 지 두어 달쯤 됐을 때였다.

그녀는 지난 두 달간 매일같이 내게 술자리를 요청했지만 번번이 핑계를 만들어 거절했다.

하지만 그날은 왠지 그녀와 함께 술자리를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짧고, 강하게 일었다.

수락하자마자 후회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꼬리수육을 사주겠다며 영등포의 어느 허름한 식당으로 날 데려갔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다 쓰러져가는 낡은 식당이었다. 그렇지만 조금 기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처음으로 꼬리수육이라는 것을 먹었다.

음식을 입에 넣자마자 외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끔히 사라졌다.

그녀는 미묘하게 바뀐 나의 표정을 보고 살짝 웃는다.

"맛있지? 주말에는 몇 시간씩 웨이팅 해야 하는 곳이야. 많이 먹어."

"네, 정말 맛있네요."

그 꼬리 수육집을 이후로도 몇 번 간 적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과 식사를 하면

그다지 맛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오직, 그녀와 함께 가야만 그 음식의 맛과 풍미가 온전히 느껴졌다.

왜일까. 그날이 꽤 인상 깊어서일까?


그녀는 소주가 한 두병 비워지는 속도에 비례해 하나 둘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아직 우리 사이의 거리가 꽤나 많이 남았는데 무척이나 수위가 높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가정 폭력을 당했어. 옷장에 갇힌 적도 있었지. 아버지는 늘 술을 드시고, 술집 여자와 바람을 피우며 어머니와 나를 때렸어. 난 결핍이 있는 사람이거든. 이를테면,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남자한테서 찾는 뭐 그런 거. 그런데 어떤 누구를 만나도 마음이 충만하게 채워지지 않더라. 누군가 옆에 있어도 항상 외로워. 조금쯤은 술에 의지하나 싶기도 해."


그녀는 보따리 속 잡다한 물건들을 시장 가판대에 펼치듯 속내를 털어놓는다.

불쌍하다거나, 안쓰럽다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다만, 저런 이야기를 타인에게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나라면, 절대 그럴 수 없었을 테니까.


"금전적으로는 여유가 있는 편이라, 그 부분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많이 누렸다고 생각해. 사랑은 없었지만 하고 싶은 건 다 한 편이지. 유학도 오래 했어. 물론 원해서 간 건 아니었고, 보내졌지. 어느 날 방과 후에 집에 와 보니 그렇게 결정이 됐다고 하더라. 그 결정에 내 의사는 단 한 점도 없었지만, 대 들거나 반항할 수 없었어.

또 맞기는 싫었거든."


잠시 고민했다. 어찌 되었건 좋은 환경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부러워해야 할까, 자기 뜻대로 결정할 수 없었던 것에 유감을 표해야 할까.


우리 대화의 8할은 그녀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난 대개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별 다른 리액션 없이 끄덕끄덕 하는 정도.

그녀는 한 번 말을 시작하면, 자리가 파할 때까지 끝없이 여러 주제에 관련해 대화를 이어간다.

직관적으로 말하면, 말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다.

그중 가장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주제는 자신의 슬픔에 대해서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슬픔에 대해 웃으며 떠들어댄다.

떠들어댄다-라는 표현이 조금 격할 수 있지만, 그녀가 타인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 싫다.

아마도 자신의 공허를 타인으로 채우길 원하는 듯하다.

그녀를 알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엔, 그녀가 좀 더 진중한 사람이길 바랐다.


그녀의 말을 듣다 보면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라는 책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엄마는 아직도 아버지를 사랑한대. 정말 웃기지. 가정 폭력을 일 삼고, 하루가 멀다 하며 바람을 피우는 남자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 걸까. 근데 더 웃긴 건 나도 엄마의 인생을 닮았다는 거야. 내가 만나는 남자마다 하나같이 쓰레기가 아니었던 적이 없어. 난 그걸 알아도 그냥 묵인해.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


그녀는 늘 밝고,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그 웃음이 오히려 그녀를 외로운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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