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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향(向)

그녀(2018) 봄#2

by 리그리지 전하율

그녀와 처음 진중한 대화를 나누었던 그날 밤이 여즉 내 가슴에 남아 나를 괴롭힌다.


툭 던지듯 속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녀는 투명하고 솔직한 사람 같아 보였지만, 난 늘 보이는 것 뒤에 감추어진 이면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의 이면은 지독한 고독이었다.

물론 그 고독에 대해 늘 이야기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 전체의 십 퍼센트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보다 훨씬 끔찍한 지옥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몇 번의 계절이 더 흐른 후에야 그녀의 지옥이 훨씬 어둡고 깊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쨌거나 그녀와 처음 함께 한 술자리는 즐거웠다 할 수 있겠다.

한두 시간 정도 대충 분위기만 맞추다 자리를 파할 생각이었지만 나는 해가 뜰 때까지 그녀의 옆을 지켰다.

그녀의 이야기가 나름 흥미로웠고, 그녀의 이면이 어스름하게 보여 그 어둠 속에 혼자 둘 수 없었다.

적어도 오늘은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 데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알량한 사명감이 일었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나는 그녀와 결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밤, 모순적인 두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우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깊게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그녀의 인생에 어떤 형태로든 스며들게 되면 퍽이나 고생스러울 것 같은 기시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적어도 내 본능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녀와 가까워지지 마!'

하지만 그 너머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정은 내 마음이 조금 동했다는 것이다.

난 애초에 타인에게 벽을 세우는 사람이다.

그런 타고난 성격 때문에 자발적으로 겉도는 편이고, H는 나를 애증 했다.

그런 내가, 별 다른 이유도 없이 거의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에게 끌리고 있다.

내게는 큰 사건 같은 일이다.

나는 분명 그날 밤부터 그녀를 '친구' 혹은 그 비슷한 것쯤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래, 이건 엄청난 사건이다.


난 모든 사건엔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라 어떤 일이 발생하면 그 동기에 대해 탐구하는 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짧은 인생을 살며 수집한 데이터가 나타낸 결과는, 어떤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사건보다,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일들이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특히 그 사건이 '감정'이라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라면 더욱이가 그랬다.

그녀가 내게 그런 사람이 된 거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수반한 사람.


"연기 말고도 하고 싶은 게 있어."

무엇일까 궁금했다. 나와 같은 진로에서 망설임을 가진 또래의 친구가 새롭게 꾸는 꿈을 무엇일까.

"바텐더가 하고 싶어. 유학 생활이 끝나고 귀국했을 때 어느 칵테일 바에서 일을 했어. 꽤 길게 했지.

길게 할 만큼 적성에 맞았달까."

그녀는 생각보다 전문적이었다. 관련 자격증도 취득했다며 수줍게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연기에 대한 망설임이 생긴 후에 가장 먼저 생각난 건 칵테일을 전문적으로 다시 시작해 볼까-였어. 바텐더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아. 내가 만든 음료를 마시며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내 마음도 조금은 차분해져."

그녀는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마음의 안식을 얻는다 말했다.

"그래서 언젠가 나만의 작은 공간을 만들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어."

그녀는 답지 않게 잠시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지만 이내 내 눈을 보고 질문한다.

"그런 공간이 생긴다면, 너도 올래?"


그녀에게서 도망치라는 내 본능을 무시해 버린 나는, 결국 여우비에 흠뻑 젖은 채 빗 속을 헤매는 신세가 됐다.

볕이 든 날 잠깐 흩뿌리는 여우비인 줄 알았건만 그 비가 조금씩, 계속 내려 난 비에 젖은 줄도 모른 채 비를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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