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2018) 여름
이 이야기는 글의 서두를 열었던 '기'에서 벗어나 이제 막 전개가 될 예정이다.
곧 이야기를 풀어갈 사건들이 하나둘 시작된다.
본격적인 스토리를 풀어놓기 전, 나의 마음을 가다듬으려 한다.
꽤나 많은 용기를 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018년의 여름,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사람은 H와 그녀다.
H와는 변화한 형태로 몇 번의 계절을 함께 보냈다.
H는 지난 계절 동안 창업 준비를 해 종로의 조용한 골목에 이자카야 술집을 오픈했다.
메인 거리에 위치했다면 훨씬 나았겠지만, 그가 조달할 수 있는 자금 내에선 지금이 최선이라며 보조개가 쏙 파이게 웃어 보였다.
H의 술집은 마치 그 자신 같았다.
H라는 사람이 사물이 된다면- 같은 느낌이랄까.
주방까지 합쳐 13평 남짓 되는 조그마한 공간 안에서 들려오는 90년대 시티팝은 그곳과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시원한 나무향이 느껴지는 원목 가구들은 H가 직접 도안을 만들어 주문 제작을 한 집기들이었다.
그의 감각은 매우 뛰어났고 그 감각의 산물들이 매우 황홀하다 느꼈다.
벽면에 붙어 있는 폴라로이드 사진과 낡은 포스터들은 H가 각국을 여행하며 직접 수집한 것들이었다.
그는 여느 이자카야 술집 사장과는 다르게 늘 흰 셔츠에 갈 색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했다.
흔히 생각하는 이랏샤이마세!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마치 고급 양식집 셰프가 입을 듯한 복장이었다.
H의 삶과 감각이 녹아 있는 그 술집은 오후 6시에 오픈해 새벽 4시에 셔터를 내렸다.
난 H를 보기 위해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종로의 조용한 골목에 있는 그곳을 방문했다.
초여름의 습한 기온과 후덥지근한 바람이 여실히 느껴지던 어느 저녁, 난 H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친구랑 같이 가도 돼?"
"그럼. 두 자리 예약석 두면 되는 거지?"
"그래주면 고맙지. 두 시간 후쯤 갈게."
그날은 마치 청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초여름이었다.
그냥 날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맥주를 곁들이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저녁이 되어도 들리던 여름의 풀벌레 소리는, 이 도심의 한가운데에서 느끼기엔 꽤 특별하다는 느낌을 줬다.
조금 더 간절하게 바라면 H를 처음 만난 그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 연인을 보여 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열었다.
한 계절이 지난 고작 그 짧은 새에 말이다.
그녀와 난 합정에 새로 생긴 카페에 들렀다 H의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기로 한다.
합정역 6번 출구 위로 총총 뛰어온 그녀는 내게 투명한 봉투를 내민다.
"이게 뭐야?"
"지난번에 강릉에서 소품샵을 갔는데, 너 닮아서 하나 사 왔어."
뽀글뽀글한 게 마치 양털 같은 노란색 곰돌이 파우치다.
마음에 쏙 들었다.
"이게 왜 날 닮았어?"
"글쎄. 내가 보기엔 그래."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아무 날도 아닌 어느 날, 타인에게 불쑥 선물을 건네는 사람.
그 노란색 곰돌이 파우치 때문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내게 물었다.
"무슨 색이 제일 좋아?"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다.
"흰색을 가장한 아이보리 말고, 순백의 흰색."
"아, 오늘 입은 원피스 색깔 같은?"
"그렇지."
"왜?"
그녀의 왜,라는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러게, 왜 흰색을 좋아했더라.
나는 생각보다 많은 것에 이유를 모르는 사람인가 보다.
"내 눈에 예뻐 보여"
우리는 합정의 새로 생긴 카페에서 많은 사진을 남긴다.
그녀는 사진 찍는 것과, 찍히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다.
사진 속 그녀는 늘 행복해 보인다.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H의 가게로 이동할까 하다, 날이 좋아 반 절 정도는 걷다가 힘들면 택시를 타기로 한다.
더운 바람에 이마에 살짝 땀이 맺혔지만 그 감촉이 나쁘지 않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그 어떤 고민도 없는 사람인처럼 순간을 즐긴다.
내가 입은 흰색 원피스는 무채색의 그 남자를 처음 본 순간 입었던 그 원피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