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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향(向)

너(2017) 가을#2

by 리그리지 전하율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고 나를 좋아하겠다던 H는 정말로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엔 서서히 증오가 비쳤다.

H의 눈은 오로지 나만을 좇았고 나 역시 그 사랑과 증오에 점점 익숙해졌다.

그는 내가 그를 온전히 내 사람이라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난 그의 구원이 될 수 없었기에 굳이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H와 함께한 모든 날이 저무는 것을 아쉬워했다는 그 작은 사실을 그는 여전히 조금도 알지 못하고, 그는 여전히 내게서 의미를 정의할 수 없는 수많은 의미를 지닌 사람이다.

무엇도 드러내지 않는 내게, 그는 어떤 날에는 눈물이 맺힐 정도로 다정하다가도 또 어떤 날에는 온몸에 한기가 들 만큼 냉정한 사람이다.

H는 내 신변에 크고 작은 물리적인 변화가 있을 때 언제나 모든 걸 제쳐두고 달려와 나를 안아줄 만큼 다정했고, 그는 빗속에 나를 홀로 남겨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만큼 냉정했지만 결국엔 언제나 다시 돌아와 이미 젖은 내게 우산을 씌워줬다. 어차피 씌워줄 우산이라면, 왜 내가 홀딱 젖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가던 길을 되돌아 다시 오는 것일까. 그 마음은 사랑일까.


"왜 다시 왔어?"

"기다릴까 봐."

"그럼 왜 갔어?"

"네가 잡아주길 바라서."

"안 잡았는데 왜 다시 왔어?"

"그래도 역시 혼자 둘 수는 없어서."

짧게 대답을 마친 그는 온통 젖어 있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젖은 채 몸을 가볍게 떠는 H를 보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이 알량한 충동에 내 손을 맡긴 그 후를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관계의 변화는 늘 두렵다. 그래도 이쯤은 해도 되지 않을까. 그의 옷깃을 살짝 잡았다.

"여기에 있어."

난 H의 옷깃을 스치 듯 잡은 채로, 그는 마치 세상에 나밖에 보이지 않다는 듯, 우리는 그렇게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를 어떠한 가림막도 없이 맞고 말았다.


그 해 가을 H는 군인이었다. 입대 전까지 우리는 학창 시절과 다를 바 없이 긴밀한 사이를 유지하고 잦은 만남을 가졌다. 우리가 그렇게 오랜 시간 서로에게서 분리되었던 것은 입대 후가 처음이었다.

입대 전부터 쓸데없는 걱정이 많아졌다. 평소에 하지 않던 무수한 망상이 오랜 시간 머리를 헤집었다.

혹여 총기 사고가 나지 않을까, 구타를 당하지는 않을까, 더 멀리 가서는 전쟁이 나지는 않을까, 오만가지 상상을 다 했던 것 같다.

물론 그런 망상을 H에게 전하지 않고 그저 잘 다녀오라는 담백한 인사로 그를 보냈다.

입대 날 그는 돌아서는 나를 멈춰 세우고는 세게 한 번 안았다. 어떤 다짐 같은 포옹이었다.


그날 밤 그를 안 이래 처음으로 그의 잘 자-라는 인사가 없는 밤을 보냈다. 공허했다.

하지만 그 공허는 그 하루뿐이었다.

나는 그와 조금씩 거리를 두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어른이 되면 다들 이렇게 서서히 멀어지는 걸까-라는 아주 조금 서글픈 생각을 하며.

H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훈련소에서 온 편지 두 번을 제외하고는 꽤 오랜 시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차츰 그가 몽땅 사라진 하루가 익숙해지던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전화를 받기도 전에 H임을 알았고 그 사실을 앎과 동시에 그가 그리웠다. 그리고, 정말 그를 내 인생에서 덜어낸 것이 아닌 단지 그가 없는 하루가 그저 조금 익숙해졌을 뿐임을 깨달았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에는 여러 감정이 묻어있었다. 내 단조로운 목소리와는 상반된 목소리였다.

H는 잘 지냈어?- 따위의 흔한 안부는 묻지 않고 많은 감정을 눌러 담은 보고 싶다- 한 마디를 건넸다.

나 역시 그가 보고 싶었다. 그를 알게 된 이래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아, 어쩌면 그리웠던 것일까.

난 보고 싶은 감정과 그리운 감정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그 사람 자체와 마주하고 싶은 것이 보고 싶다- , 그 사람과 함께한 순간을 마음에 되새기며 못내 아쉬워 어쩔 줄을 모르는 감정이 그리운 것이 아닐까 하는 혼자만의 막연한 정의를 내려본다.

지금에서 그 순간을 떠올리면 헷갈리지만 당시의 난 그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을 매일 본다며 조금은 담담하게 말했다. “왜?” 나는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내가 생각하는 이유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굳이 그에게 질문했다. 그리고 H는 참 솔직한 사람이다.

“널 좋아하니까.” 그러면 왜 일 년을 넘게 나를 찾지 않았는지 물었다.

H는 대답 대신 제대 후 나를 만나러 와도 되겠냐 물었다.

난 그가 어떤 다른 변화를 원해 내게 오는 것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난 여전히 가을을 좋아해.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니까. 너는 어때?”

나는, 네가 함께였던 가을을 좋아해.

그는 이어서 말했다.

“네가 좋아하는 겨울에 내가 좋아하는 가을이 있는 곳에 가고 싶어.”

그의 말이 아리송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곳이 어디든 함께이고 싶었다.

“좋아.”


무채색의 그 사람을 떠올리지 않은 밤이었다.

그저 H가 내 곁에 다시 왔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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