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2017) 가을#1
사진에는 사진을 찍은 사람의 시선이 담겨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난 그 말을 실제로, 온몸으로 느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모든 사진에서 나를 향한 어떤 마음이 느껴지는 의미심장한 사진.
H가 찍는 사진의 피사체는 대부분이 나다.
앞으로 이 이야기에 등장할 사람 중 정확한 이름이 나오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고 지금부터 이야기할 H는 이름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러나 H는 내게 수많은 의미가 담긴 묘한 사람이다.
수많은 의미가 중요한 의미와 같은 뜻인지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지만.
우선 H는 살아온 인생의 반절을 함께한 친구다. 그것도 꽤 오랜 친구인 셈이다. H는 내가 아는 모든 타인 중 유일하게 타인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사람이며, 조금쯤은 나의 일부라고 느껴진다. 그는 완벽에 가깝게 나를 이해하고 들키고 싶지 않은 자그마한 마음조차 읽어버린다.
H는 어떤 날에는 눈물이 맺힐 정도로 다정하다가도, 또 어떤 날에는 온몸에 한기가 들 만큼 냉정하다. 난 H의 그런 이중적인 면에 가끔 매력을 느꼈다.
H가 찍은 나의 사진에는 사랑과 증오가 정확히 반절 씩 보였다. 사랑 혹은 증오일까.
H는 나와 친구로 지내는 내내 나를 좋아하면서도 가장 싫어했다. H가 내게 반절 씩 다른 감정을 가진 그 긴 시간 내내 그를 거의 유일한 내 사람이라 여겼지만 H가 버거웠다.
하지만 그런 혼란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던 와중에도 분명한 사실은 있었다. 그것은 단순하지만 절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H와 함께한 시간은 내 청춘의 정의다. 우리는 학창 시절 내내 서로를 가장 최우선으로 여겼다. 난 여전히 H가 교복을 입은 모습을 기억하고, 그는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 중 교복이 가장 잘 어울렸다.
남색 마이 속 흰 셔츠와 회색 바지를 입은 H의 모습은 어느 청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말간 얼굴로 동그랗게 눈을 뜨고 누군가를 쳐다볼 때면 상대는 늘 H에게 빠져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나 싱그러운 모습을 간직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교복을 입은 모습을 기억한다는 것에는 참으로 여러 의미가 담겨있다. 아마 우리는 오랜 시간 ‘그 시절’의 우리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닐까.
H를 떠올리면 뇌가 온통 엉킨 것처럼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게 된다.
2017년도의 가을, H에 대한 흔들림이 생겼다.
우선 간략하게 내가 알고 있던 H의 마음을 설명하자면, H는 거의 처음부터 나를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대했다. 남녀가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어느 쪽은 반드시 이성적인 호감이 있다는 흔해 빠진 공식이 우리에게도 적용이 되었던 것 같다.
물론 나는 타인의 감정보다 내 감정이 더 우선시 되는 사람이기에 그의 입으로 직접 그 감정에 대해 듣기 전까지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아니, 자각하려 하지 않았다.
H가 자신에 감정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했던 날이 여전히 생생하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늦가을의 초저녁, 그는 나를 집에 데려다주며 자신은 가을이 좋다고 말했다. 나는 왜냐고 물으며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고, 그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니까.” 라며 다시 앞을 보았다.
나는 그렇다면, 겨울이 좋은 것 아니냐며 반문했는데 H는 꽤 오랫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천천히 걷는 새에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늦가을의 하늘은 오렌지 색이었고 딱 10월 말의 온도, 그리고 습도였다.
H와 함께 하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못내 아쉬운 가을의 초저녁이었다.
난 늘 그와의 시간이 아쉬웠다. 그와 함께 보낸 하루가 저물고 홀로 남을 때면 마치 내 청춘의 한 날이 지나간 것 같아 견딜 수 없을 만큼 서운했고 너무도 빨리 어른이 될 것 같아 무서웠다.
사실 영원히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나는 영원히 어린이로 남고 싶었던 피터팬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하던 소녀였다. 그 마음은 H와 함께할 때 최고로 증폭됐다. 그의 손을 잡으면 시간을 멈출 수 있을까-라는 바보 같은 바람을 마음에 새긴 적도 있다.
H는 우리 집에 다다를 때 즈음 입을 열었다. “난 원래 가을을 좋아해. 그런데 네가 겨울을 좋아하잖아.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가을이 지나면 곧 네가 좋아하는 겨울이 온다는 것을 아니까 그 사실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 H의 그 말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H는 오래 뜸 들이지 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해. 네 마음과는 상관없이 앞으로도 난 계속 너를 이렇게 좋아할 거야.” H는 관계의 변화를 바라고 내게 감정을 전한 것이 아니다.
그저 하루가 저무는 것이 아깝던 청춘에, 계획에 없던 고백을 나직이 전했다.
그의 말은 마치 시 같았다.
그리고, 나는 H가 나를 좋아함과 동시에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세상에는 오직 나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H는 부모도 형제도 없었다. 아주 어릴 적 교통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고 조부모의 손에서 자란 그는 고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무렵 마지막 남은 가족인 할머니를 여의고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
난 자발적으로 타인에게 벽을 세웠지만 그는 물리적으로 혼자였다. 그는 타인에게 세우는 벽을 본인에게마저 희미하게 세우는 나를 못내 섭섭해했다. 그는 나의 희미한 벽이 자신으로 인해 허물어지길 원했다.
정확히는 내가 자신의 구원이 되어주길 바랐다.
그저 어리기만 한 나는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혼자라는 슬픔을 알지 못했고 알 수 없었으며 그랬기에 공감할 수 없었다. 나는 H를 불쌍히 여긴 적이 단 한순간도 없다. H는 내가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엇보다 잘 알고 있었고 바로 그 부분 때문에 나를 좋아하면서 증오했다. 그는 나에게서 어떠한 감정적 교류를 원했다. 하지만 난 거짓으로 그의 상황에, 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구원이 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