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2018) 여름#3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내 안에서 용암처럼 들끓는 원초적인 감정을 그대로 H에게 내보여, 분란을 만들어야 할지, 아니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조용히 마무리해 넘겨야 할지.
의미 없는 감정 소모는 싫다.
사소한 다툼으로 인해 끝이 날 관계라면 더욱이 감정 소모를 할 필요가 없고,
싸움 끝에 결국 화해할 것이라면 그 역시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생각한다. 무척이나.
다툼 자체를 부질없는 행위라 여긴다.
그렇지만, 난 분명 용암처럼 들끓는 원초적인 '화'가 있었다.
왜 그런 감정이 있었냐 하면, H와의 관계가 늘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 간 H에게 거슬리던 것을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마음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조금 더 솔직해지면, 그가 나를 바라보는 마음이 정말 사랑이 맞는지 궁금했다.
사랑보다, 다른 어떤 감정이 더 앞선 듯 느껴졌다.
이를테면 통제, 같은 것.
H는 내가 늘 그의 세상에 머물기를 바랐다.
처음 그의 가게를 오픈할 적에는 내게 동업 제안을 했다.
물론 거절했다. 나는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 여긴다.
나는 나고, 그는 그다.
우리가 같은 사람일 수는 없다.
그는 여전히 내게서 구원을 바라며, 그 구원은 하나, 즉 일치라는 것일까?
"나랑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
"말 그대로야. 그분, 한 없이 가벼워 보여."
"처음 본 남자한테 그런 식으로 행동해서? 단지 그것 때문에?"
"내 세상에 너 말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는 일순간 말이 없어진다.
꽤 오래 어설픈 침묵을 유지한다. 입술을 조금씩 움직이며.
나 역시 그와의 관계에 금이 가는 것이 싫다.
H는 차갑게 가라앉은 나의 마음을 느꼈는지 내게 다가와 손을 잡는다.
"그런 게 아니야. 제발. 이상한 생각하지 마. 어쩌다, 다툴 수 있는 거잖아."
대화가 묘하게 겉돌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 누구도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H는 여전히 내게 어려운 사람이다.
그와 함께한 숱한 계절이 내 마음의 심연에 짙게 깔려 이다지도 쉽게 손을 놓을 수는 없다.
그리고, H는 날 가둘 수 없다.
"내가 혼자였던 너에게 가장 익숙한 사람이고, 홀로 남겨지는 게 싫어서 나를 좋아하는 거야?"
반드시 확인해야만 하는 너의 마음.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 게 맞아?"
너는 다시금 입을 굳게 다문다. 찰나의 침묵으로 난 이미 답을 들었다.
"그 자리가 내가 아니어도 상관이 없겠네? 너의 공허만 채울 수 있다면? 그리고 난 네 공허를 완벽하게 채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거지?"
속이 조금 쓰려 말을 두서없이 뱉게 된다.
"그것도 사랑이잖아."
"대체될 수 있는 마음이 어떻게 사랑이야?"
"그러는 넌? 너는 단 한 번이라도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그런 마음을 가진 적이 있어? 나한테 간절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니?"
그의 언성이 높아졌다. 나를 빗 속에 홀로 남겨두고 갈 만큼 매정할 때가 있던 너다.
언제나 다시 돌아왔지만.
언제나 다시 돌아올 그임을 알기에, 그를 두고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는 목에 걸린 생선 가시 같다.
난 결국 한 발 물러서기로 한다.
"난 네가 아니면 안 돼. 너를 놓을 수 없어."
H만큼이나, 나의 사랑 역시 정상의 궤도는 아닌 듯하다.
아니,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는 할까?
그리고 나의 대답을 들은 그는 안심한다. 오늘도 내가 떠나지 않았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