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2018) 가을
그 가을, 그녀는 첫눈에 반한 그 남자와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했다.
그녀는 일을 하다 여유 시간이 생기면 주로 그 남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남자는 그녀보다 8살 연상이었고, 난 그 사실이 못내 꺼림칙했다.
그녀가 또래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저 아무런 눈치 볼 것 없이 편안하게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또래의 누군가가 그녀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거의 모든 것을 맞추었다.
사소한 것부터 크다 할 수 있는 어떤 가치관까지, 모조리.
나와 H의 사이엔 그날의 다툼 이후 미묘한 경계가 생긴 듯했다.
의식적으로 서로의 신경에 거슬려 쓸데없는 잡음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노.력.했.다.
H는 여전히 엄청난 불면에 시달렸고, 난 그 곁을 조용히 지킬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말간 웃음은 날 기억의 저편으로 데려간다.
과거의 잔상을 끝내 떨쳐내지 못해 애써 붙잡고 있는 나와, 그런 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H,
그리고 서로를 가두는 우리 두 사람.
인간이란 원래가 내 옆의 가장 가까운 누군가를 설정하고 내 뜻대로만 움직여줬으면 하는 바람을
내면 깊숙 한 곳에 숨기고 있는 것일까.
그 사람의 눈동자가 오직 나에게 향하기만을 바라며?
나는 H에게 그런 류의 감정들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그가 날 통제하려드는 것은 참을 수 없지만,나는 그를 가두고 싶은 것일까?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이 잔뜩 엉켜 있는 실타래처럼 머릿속에서 무궁히도 꼬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내 하루에 어떠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어떠한-의 범위를 확정 지을 수 없지만, 어쨌든.
H의 감각적인 이자카야는 입소문을 타고 날이갈 수록 가파른 상승세를 그린다.
그는 적어도, 수많은 고민의 카테고리 중 '진로' 부분에서는 다소 나아진 듯하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그를 찾아간다.
그 해 가을의 끝자락엔 여전히 H가 있었다.
그날도 저녁 아홉 시쯤, 그를 찾아갔다.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인지 유난히 조용한 날이었다.
내가 선물한 작은 입간판을 지나쳐 그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시선이 닿은 것은 웬 손님이었다.
정확히는 웬 여자 손님이었다.
문이 열리고, 내 눈과 H의 눈이 마주쳤을 때 일순간 당혹감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그 간 느껴왔던 불안과는 다른 류의 불안이 피어올랐다.
아니, 화가 난 것일까.
한 없이 하잘 것 없다는 생각을 했다.
H가 왜 당혹스러워했는지, 사실은 알고 있다.
아마도, 그 여자 손님은 꽤 자주 H를 보러 그곳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H를 조금이나마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맞다면, 그 손님에게서 내게선 느낄 수 없던 '안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구원을.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헛 된 것이 아닌지, 난 그의 얼굴에 잠깐 스쳤던 감정을 보자마자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H는 그 사람을 사랑하진 않는다.
하지만, 사랑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대화를 해서 오해를 풀어야 한다는 뻔한 공식은 적용되지 않는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자연히 알 수 있는 것이 우리 사이에 있다.
우리는 그런 막역한 사이다.
하지만 하잘 것 없다.
나는 몸을 돌려 그의 세계에서 한 발짝 멀어졌다.
내가 그에게 등을 보이자,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내게 온다.
"오해야."
우리가 처음 시작할 무렵 즈음도, 너는 진부한 말을 내게 건넸다.
보고 싶다는 것 처럼, 그런 흔해 빠진 말을.
오늘도 진부한 말을 내게 건넨다.
내 팔을 잡은 그의 팔을 정중히 떼어낸다.
누군가 우리가 함께 했던 청춘의 한복판에 대해 이야기로 풀어내라 하면 두꺼운 소설 한 편이 금세 완성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이별은 고작 몇 페이지 내로 끝맺음될 것이다.
나의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네가 아무리 애원해도.
"제발 가지 마. 뭐든 내가 잘못했어."
하필, 조금 이른 눈이 내린다.
가을의 끝인 줄 알았는데, 겨울의 시작이었던 걸까.
눈송이가 그의 갈색 머리칼에 조금씩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너는 오늘도 나의 하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구나.
안녕. 나의 청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