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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생 Aug 12. 2024

우리가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


"즐거웠어요. 그동안."

따스한 햇빛이 드는 오후, 여자가 남자에게 말을 건넨다.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지만, 따뜻하게 대답한다.

"뭘 얼마나 했다고 즐거워. 만나자는 말 하고 12시간도 안 지난 거 알아요?"

"12시간도 안 지났지만, 12달쯤은 만난 것처럼. 그쪽한테 푹 빠졌어요 내가.”  …  “쪽팔리고, 자존심 상하지만."

대답을 들은 남자는 고개를 떨군다. 잠시 정적이 흐른다.

"사랑을 위해서 왕좌를 버릴 생각은 없어요?"

이번엔 여자가 잠시 생각에 빠진다. 여자의 눈은 슬프지만, 입은 옅은 미소를 띤다.

그러다 결심한 듯 이별의 악수를 건넨다.

"잘 가요. 잘 지내고."

송중기와 문채원 주연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옛날 작품이라, 지금 보면 뻔한 설정에 적잖이 오글거린다. 작 중에서 송중기는 바텐더다. 안정적이지 못해 보이는 직업 때문에 여자의 집안에서 인정받지 못한 채 이별을 통보받는다.

현실은 드라마와는 많이 달랐다. H는 나에게 빠진 적 없었다. 애잔한 분위기나 처절한 감정이 있지도 않았다. 이별에 있어서 고민이 길지도 않았다. 같은 것은 오직 '만난 지 12시간 만에 차였다'라는 사실뿐.

영종도로 드라이브 데이트를 다녀온 지 12시간이 조금 넘었다.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서로의 관점과 가치관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때마침 영종도에서 열렸던 미디어 전시도, 서로가 좋아하는 공간도 들러 생각을 나눴다. 데이트 첫날이라 긴장해서 약간은 피곤하다. H는 나에게 줄 게 있다며 집에 잠시 들렀다 다시 나온다고 했다. H가 나에게 빵과 간식거리를 주었다. 무언가를 선물 받는다는 것은 참 기쁜 일이다. 상대방이 나를 생각하며 골랐다는 것과, 받는 사람의 기분을 생각하며 그것을 담았다는 것. 그리고 나에게 건네기까지 그 먼 길을 선물과 함께 걸어왔다는 것.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마음 한편 어딘가가 따스워진다.

그 따뜻한 마음도 잠시, H는 나에게 말한다. “우리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내려앉은 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간신히 진정시키며 대답한다. “… 왜?”

그러자, H는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주로 그녀의 집안 내력과 부모님의 직업, 집안에서 바라보는 결혼관에 대한 이야기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H와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은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나는 아니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스무 살이었다면, 속는 셈 치고 잠깐 연애를 했을지도 모른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접어든 우리는 사랑의 감정보다는 어쩌면 필요에 의해 결혼을 해야 하는 나이일지도. 나보다는 그래도 H가 더 서로의 니즈를 맞춰줄 만한 결혼이 필요한 입장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나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더 이상 지속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쿨하게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이왕 헤어지는 거, 구질구질하게 붙잡지 않기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벤치에서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억장이 무너진다. 하지만 절대 티를 내지 말아야지. 실제로는 찌질할지 몰라도, 마지막까지 여유롭고 어른스러운 이미지로 남아야 한다.

다시 보자는 말은 하지 않는다. 언젠가 내가 잘 된다면, 매스컴이나 웹에서 나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쿨한 척 돌아섰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계단으로 내려가면서 혹시나 해서 뒤돌아봤다. H는 잰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아마도 속에 있던 말들을 다 꺼내놓아서 후련했던 것일까.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어차피 당하는 이별, 정들기 전에 일찍 헤어지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H도 나를 배려한 것이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서도, 새벽에도, 다음 날 아침에도 그녀의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연락할 엄두는 나질 않는다. 내가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친구와 약속이 있었지만, 친구가 떠드는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질 않는다. 딴생각을 하느라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아무래도 술을 마시는 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 말없이 친구와 소주를 나눠 마신다.

저녁 10시쯤 되었나,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무심코 카톡을 확인한다. 30분 전에 도착해 있던 H의 텍스트가 나의 마음에 날아와 꽂힌다. 갑자기 술이 확 깬다.

“오빠 오늘 전화 됑,,?”

물론이지..!라고 속으로 소리 질러 외친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온음료를 들이켜고 전화를 걸었다. H는 헤어지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시 되묻고 싶진 않다. 되물어봤다가 다시 나를 떠나갈까 봐. 이해한 척했다. 이해해야만 했다. 그것이 무엇이 중요할까, 다시 만나볼 수만 있다면.

다만, 여전히 H는 결혼을 해야 하는 적령기에 있고 나는 H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변한 건 아니다. 어쩌면 다시 만나기로 결심한 것이 H에게 좋지 않은 결정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H와 다시 만나보기로 한다. 함께하는 시간에 많은 것을 스스로 깨닫고 성장한다는 감각이 좋았다. 그녀와 만나는 시간이 짧을지라도, 만나기 전의 나와 만난 후의 나는 다른 사람이리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H는 아름답다.

내가 원하지 않는 시간에,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다시 이별을 통보받는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이미 헤어짐의 준비를 하고 시작하니 마음이 후련하다. 내일이 마지막일 수 있으니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다양한 감정과 매력을 가진 H이니까, 다양한 색의 이야기들을 가능한 많이 남겨보고 싶다.

아, 아까 이야기하던 드라마에서 둘은 굿바이 키스를 하기로 한다. 만날 장소는 여자가 정하기로 했다. 근사하게 이별키스하고, 쿨하게 헤어지기로.​

“잘 지내요, 다시 만날 때까지. 빨리 만나면 좋고, 늦게 만나면 그만큼 이별이 늦어지는 거니까.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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