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잘 드는 스타벅스에서, H와 함께 민트 블렌드와 얼그레이 바닐라 티 라떼를 시켜서 나눠 마시고 있다. 따스한 햇살이 H의 가녀린 손목에 묻어난다. 나는 해가 비치는 방향으로 앉아있어서 눈이 부시다. 오늘따라 H의 미모가 빛을 발한다는 아재 다운 펀치라인을 생각해 본다.
지금도 그렇지만, H는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자신의 주변 사람들 칭찬을 하곤 한다. H는 주위 사람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도 종종 주변 사람들의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H의 주변 사람들은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장점을 가진 사람이 많다. 세심하고, 배려심 넘치며, 겸손하기까지 하며 능력도 좋다. 모두가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일을 대하며 투철한 직업정신을 가지고 있다. H의 표현으로는 그러한 사람을 만나려 노력한다고 한다.
부럽다. 진심으로.
그런 완벽한 칭찬을 한 번쯤 들어보고 싶다. 나의 장점은 어떤지, 어떤 점을 보고 나를 만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그런데 앞에 앉아있는 H의 얼굴을 보면 입술이 잘 떨어지질 않는다. 혹시나 나의 장점이 없을까 봐. 있더라도 별것 아닐까 봐. 스스로를 드러내려 노력하고 솔직하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의 민낯을 바라보는 것에는 용기가 부족하다.
그래도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내가 선택되었으니까 만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아니다.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지금 만나고 있더라도 언제든 후회할 수 있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H가 그런 마음을 갖게 되진 않을까 자주 걱정한다. 그런 생각이 마음 한구석을 아프게 한다. 적어도 나를 만나고 있는 이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후회하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즐겁게 해주고 싶다.
H는 대화 중간중간 사색에 잠긴다. 내가 하는 말이 트리거가 되는 경우도 있고, 주변 어떤 사물을 보고 과거 회상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을 잘 말해주진 않는다. H가 사색하는 표정은 꽤나 서글퍼 보인다. 나는 그러한 H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눈은 반쯤 잠긴 채로, 힘이 없이 아래쪽을 응시한다. H가 하는 생각의 흐름을 깨고 싶지 않다. 어쩌면, 어딘가 후회하고 있는 표정일지 모른다. 정말 궁금하지만, 그래도 참아본다. 약간의 정적이 흐르고 다시 대화를 이어간다. 어딘가 후련해진 표정이다. 그리고 H는 그 잠깐의 정적을 기다려준 나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한다. 아마도 기다려줄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내 유일한 장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사랑과 불안은 정확히 비례한다.
특히 연애 초기에 신뢰관계 형성이 덜 되었을 경우에 더 그러하다. 연애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았던 순간에는 이러한 정적과 침묵을 기다리는 일이 정말 힘들었다. 혹시나 나와 관련된 문제일까 봐. 나를 만나보기로 결정한 것이, 나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후회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힘들었다. 어쩌면 그런 걱정은 나에겐 자연스러웠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1 대 1로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경우에는 서로의 이야기에 집중을 하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H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H는 깊은 내향형 인간이다. 스스로 반성하는 시간을 자주 가진다. 대화를 하다가도 사색을 하지만, 그 내용이 반드시 나와 관련한 이야기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된 내용인데, 오히려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나와 함께 있기에 나와 관련한 생각을 한다는 건 착각이다. H의 표현으로는 나의 '자의식 과잉'이라고 한다. H가 말하는 자의식과잉이란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착각하는 것'을 말한다. 내 자의식 과잉 때문에 쓸데없는 착각을 했다고 말이다.
평소에 들었으면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자의식 과잉이라는 말이 왜 이리 듣기 좋고 마음이 편한지 모르겠다. H의 사색이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나와의 만남이 후회가 된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기다리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그저 곁에 되도록 오래 있어주길 바라. 그거면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