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연생 Aug 18. 2024

남자가 소심할 때

은하를 마주하는 요즘. 나의 내면의 세계는 빠른 속도로 발전했고 온통 축제 분위기다. 어떠한 장소에서도, 어떠한 시간에도 조명이 꺼지질 않는다. 어쩌면 그들은 불을 끄는 방법과 함께 이전의 생활 방식까지 모두 잊은 듯하다.


나의 내면의 세계는 짧았지만, 길다면 긴 생의 세월 동안 많은 기후변화를 겪어왔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때도 있었고, 홍수가 이는 때도 있었으며, 가뭄이 오는 날도 있었다. 가끔은 딛고 있는 땅이 크게 흔들리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몇 년 간의 큰 상실을 겪거나, 오랜 기간 고난을 겪었던 일은 아직 없었다. 쓰나미가 일어도, 화산이 폭발하더라도 대부분 빠르면 3시간, 아주 늦어도 일주일 이내에 복구 가능했다.


고생을 덜 하면서 살아왔다는 말이 아니다. 어린 날의 내가 견디기엔 가혹했던, 몇몇의 고난들도 있었다. 누군들 그런 가혹한 순간들을 한 번쯤은 겪어 내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나의 세계가 매번 빠른 복구를 이뤄낼 수 있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 비결은 아주 간단하다. 애초에 복구할만한 뭔가가 없도록 미니멀한 내면을 유지하는 것.


비유적으로 더 표현하자면, 세계 내에 무언가를 많이 짓거나 건설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나의 세계에 사는 입주민들은, 문명으로 비유하자면 후기 청동기시대에서 초기 철기 시대로 넘어가는 지점에 있다. 생의 각 시기에 기록할 만한 몇몇 큰 사건은 시간을 들여 그에 걸맞은 랜드마크로 건설해 둔다. 금속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청동기-철기 시대에는 석재 가공기술이 발달해서, 돌을 사용해 꽤나 미려한 건축물들을 건설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미려한 랜드마크로 남길만한 생의 사건이 나에겐 그렇게 많진 않았다. 생의 기억에 많이 남지 않는, 배경이 되는 일상의 주민들은 재료를 구하기 쉬우며 유지보수가 쉽도록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흙으로 벽을 바른 집에서 생활했다. 지진이 나서 집이 소실되더라도, 무너진 부분을 조금 보수하면 그만이다. 많이 지어선 안된다. 잃을게 많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생활을 위한 건물이기에 층수는 단층으로 끝냈다.


멀리에서 보면 나의 세계 속 문명은 초라해 보이고 어딘가 비어 보이며 풍족하지 못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큰 욕심을 내지 않기에 나름 만족하며 지낸다.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조명이 없는 그들은 해가 지면 일찍 잠에 들고,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난다. 먹을 것은 풍족하진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아서, 가진 것들을 잘 분배하고 아껴서 알차게 생활한다. 대부분은 작은 마을에 살기 때문에 주변 십몇 명이 사회생활의 전부이다. 현대 문명처럼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판단하거나 비교할 수 있는 환경에 있지 않다. 서로를 아끼고 챙기며, 지켜주려고 한다. 이들은 무언가를 계속해서 서로 주려고 하지만, 받으려고 하진 않는다. 오히려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얽매이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주민들이 많다.


이상한 소리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내가 적어놓고 봐도 좀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행간 사이사이를 잘 살펴보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마음은 이처럼, 무언가에 굳이 얽매이지 않으려 노력한다. 불교 쪽 단어로 치면 공수래공수거, 불란서 쪽 단어로 치면 보헤미안쯤 되려나. 애초에 나는 그 무엇도 가진 게 없고, 그 무엇도 가져갈 것이 없다. 나에게 무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앞으로 ‘남길 것’이다. 앞으로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와 하고 싶은 일들은 있다. 그것은 오로지 남길 것에 관한 내용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남길 지를 고민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나의 단상을 굳이 글로 남기고 있는 이유 또한, 이 글이 남길 것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본디 매우 무거운 성질을 지녔다. 그런데,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되면 그 마음이라는 것은 꽤나 가벼워진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것, 개념적인 것 또한 가진 것에 포함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예를 들면 ‘이미지’가 있다. 이미지란 무엇인가? 신사다운 이미지, 똑똑한 이미지, 참한 이미지. 그런 것들이 대표적으로 잃을 구석이 많은 이미지이다. 이러한 이미지를 가진 이들은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이런 이미지까지 버린 채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생활하다 보면, 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내 이미지가 OOO 하다고 표현하거나 정의할 수도 있겠다. 나를 보고 누군가 뭐라고 정의하고 싶다고 하면 그저 그렇게 하도록 둔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이 만들어낸 나의 이미지에 얽매이지 않으려 한다. 신기하게도, 나를 보는 이미지란 것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다른 감상을 하듯, 같은 인간을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하더라. 그래서 이미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다. 나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하던 대로 변함없이 생활해 나갈 뿐이다.


어떠한 상황에서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타이밍에 맞춰서 행동하는 편이다. 특히 말에 관해서 그렇다. 어떤 말이 필요하다고 판단이 들면,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나 스스로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또는 내 주변인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무언가를 말하거나 행동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런 순간에 이것저것 재는 성격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 체면이 어쩌고, 미래가 어쩌고, 계약이 어쩌고 하는 외적으로 발생하는 부수적인 무언가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들이 있다. 나와 주변 사람들을 위해 필요하다면, 행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꼭 필요한 말과 행동일지 가려낼 수 있는 현명한 눈을 기르는 것은 물론 중요하겠다.


이를 위해서 옳다고 생각하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첫 번째로는 나의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가 아니면 나는 인정받지 못할 거야’라는 마음이 들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회사든 사람이든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두 번째로는 받는 것을 줄이고 빚을 덜 져야 한다. 아쉬울 것이 없는 몸이라야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유지하다 보면 무언가를 얻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서 자연스레 물욕이 줄어든다. 어디에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들이 크게 생기질 않는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원하게 된다. 가벼운 이 기분이 참 좋다.


가진 것도, 그래서 잃을 것도 없는 사람. 그게 나의 생이 추구하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나에게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 생겼다. 잃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생긴다는 느낌이 싫진 않지만 썩 익숙하지도 않다. 위에서 말했던 나와는 이질적인, 이상한 인간이 되어감을 느낀다.


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했던 이미지를 신경 쓰는 인간이 되었다. 나를 ‘좋은’ 사람으로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생긴다. 나의 평소 생활습관과 대외적인 능력들, 이외에 모든 면들이 평가요소라고 생각한다면 너무나 두려워진다. 눈이 높은 H가 볼 때, 혹시나 나의 어떤 면이 마음에 안 들어 어느 순간 훌쩍 떠나가진 않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이 혼자 있을 때 이따금씩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온 방식 그대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안간힘을 다한다. 떠나갈까 두렵지만, 만들어진 모습으로 억지로 붙잡아두어선 안된다. 거짓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환상을 만들고, 그 환상이 깨졌을 때 커다란 실망이 찾아온다. 단 하루를 만나더라도, 괜찮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해도. 나에 대해 좋은 기억을 ‘남기려’ 노력한다. 단 하나의 모습을 남길 수 있다면, 나는 그게 ‘진정성’이었으면 한다. 짧은 시간이더라도 H를 사랑했던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는 것. 이것이 이번 연애에서 ‘어떻게’ 남길지에 대한 결론이다.


솔직한 나의 생각을 H에게 말할 때면, 언제나 나의 속마음은 벌벌 떨고 있다. 잃을게 생긴 나는 점차 소심해진다. ‘혹시나 내가 했던 말이나 나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들면 어쩌지..?’ 하는 걱정 때문에 말이다. H를 대할 때면 온몸이 관통당하는 느낌이다. 마치 나를 통과하며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X레이 같다고 해야 하나. 이상하게도, 평소에는 안 그러다가도 H를 생각하기만 하면 마음이 쪼그라든다.


만약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들을 언젠가 H가 전부 읽게 된다면, 어떤 부분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의외로 별생각 없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떨고 있는 나의 마음을 애써 외면한 채, 이 연애에서 최후의 유언이 될지도 모를 단말마라고 생각하며 매번 글을 남긴다. 이 글들은 아이들을 물가에 내놓듯, 세상에 내어놓는 나의 날 것 그대로의 생각과 감정이다. 누군가 평가를 한다고 생각한다면, 나의 마음 그대로를 드러낼 수 없다. 누군가에 ‘잘’ 읽히기 위한, 평가받기 위한 글은 진정성이 빠져있는 빈 껍데기다. 누군가에게 잘 읽히고 싶다는 마음이 나의 글들에 섞이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 이 글들은 굳이 친절할 필요도 없다. 비유적인 표현이든, 문학적인 표현이든. 내가 표현하고 싶은 대로, 남기고 싶은 대로 축적해 나가는 제 멋대로 일기장인 거다.


나의 내면의 세계 안에서는, 뒤가 없는 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H와의 행복한 추억들과 진한 감정들이 쌓여 나간다. 그만큼 무너졌을 때 아플만한 것들이 많아진다는 말이다. 아파야 하는 상황이 온다는 것은 상상하기 싫지만. 드루와라. 그래도 오겠다면, 기꺼이 아프게 맞을 테니.

작가의 이전글 밥 잘 사주는 귀여운 아저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