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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생 Oct 27. 2024

제주의 넉넉한 공간과 H의 생일상

H와 오기로 했던 그 제주의 장소에 도착한다. 이 장소는 몇 해 전부터 나도 오고 싶었던 곳이다. H를 위한 선물이 아니라, 어쩌면 나를 위한 선물일지도. H 덕에 이런 곳도 와보고,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장소에서 곳곳을 둘러보면서, 가이드분이 설명해 주시는 공간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건축가가 심혈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여러모로 그 건축가의 철학이 담겨있는 모습이 참 좋았다. 그 건축가는 평생을 이방인으로서 평생을 살았다.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일본에서 잘 정착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어딘가에도 속하지 않는 삶. 내가 이 건축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 또한 이방인과 같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어딘가에 항상 속해 있었지만,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때가 많았다. 학교에서도, 군에서도, 직장에서도 나는 이 집단에 완전하게 소속된다는 마음을 갖지 못했다. 그 마음은 완전히 조직에 의지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마음에는 언젠가 이 단체와 이별을 해야 하는 날이 오는데, 완전히 의지하게 되면 나 스스로 상처를 받을까 두려웠던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어딘가에 완전히 소속되는 것이 싫었던 나는 조직에 마음을 주지 않는 습관을 들여갔다. 이 마음들이 자라고 자라 어른이 되고 나서는 조직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자리 잡았다. 30대가 된 지금에서도 느끼는 바는, 내가 조직을 향해 헌신한다고 해도, 조직은 나를 ‘쓰임’에 의해 판단하고, 쓰임새가 줄어들면 가차 없이 내친다. 때가 묻어버린 현실의 나 또한 여전히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독립적인 마음이 종종 나를 서글프고 외롭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종종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기대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그저 현재를 살아가는 직장인인데, 이방인으로서 나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서 평생을 살아왔던 건축가에게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다.


설명을 듣고 공간을 둘러보다 보니 두 나라 문화 모두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예로, 창호 간살을 표현하는 방법에서 일본 문화와 한국 문화를 함께 표현하려 했다. 창호의 경우 간살이 밖으로 보이는 것은 한옥이고, 안으로 보이는 것은 일본식이라고 한다. 하나의 창호에 두 나라의 표현 방법을 함께 사용했다는 것은 본인이 이방인이면서도 동시에 두 문화를 하나의 공간에 함께 녹여내고자 하는 의지가 아닐까 싶었다. 이외에도 공간에서 건축가가 이용자를 위해 했던 고민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따스하고 다정한 디테일이 많았다.


H가 표현하기로는, 이 공간이 갖는 사치가 참 좋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이 표현하기에 럭셔리라 함은, 비싼 자재로 화려하게 장식된 공간들을 일컫는다. 대리석으로 전체 공간을 마감하고, 각종 비싼 가구와 반짝이는 조명들로 공간을 뒤덮은 공간 말이다. 하지만 이 공간은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사치나 럭셔리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오히려 소박하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자연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재인 석재와 목재로 마감을 했고, 공간 자체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차분하고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H가 말하는 사치는 아마도 여유로운 공간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도심 속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효율을 위해 밀도 높게 오밀조밀, 힘겹게 모여 산다. 반면에 이 공간은 여유롭게, 그리고 넉넉하게 오로지 쉼을 위해 공간이 구성되어 있었다. 공간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 그것이 진정한 사치와 럭셔리라는 것이다. 단순히 손님을 많이 받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공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장소 내 어떤 공간을 둘러보더라도 방문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세심하게 신경 쓴 공간이라는 것. 이러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공간을 효율적, 금전적으로만 대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의 휴식과 마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그를 위해 필요하다면 효율에서 벗어난 공간 또한 제공할 줄 알아야 가능하다. 공간을 대하는 여유는 사람을 대하는 여유로움에서 나오고, 그 여유가 방문객의 마음을 따스하게 만든다. 중간중안 자연과 실내 공간을 연결하려 만들어놓은 숨구멍들은 방문객들의 마음에도 숨구멍의 역할을 한다. 방문객의 바로 눈앞에 자연이 펼쳐지고, 맨발로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H의 이런 마음은 신기하게도 건축가의 철학과도 연결된다. 건축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건축에서 완벽함 만을 추구한다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기능으로 다듬어진, 차갑고 무미건조한 공간이 되고 말 것이다.”

여기에서 얘기하는 완벽함이라는 것이 기능과 효율이라면, 사람을 따스하게 품어내는 공간은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H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직관적으로 알아챈 걸까.


아침 식사 공간 또한 그러한 여유로움과 따스함이 느껴진다. 포도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아늑하고 따뜻했으며, 자연을 향해 트여있는 뷰는 아침을 더욱 상쾌하게 만들어 준다. 나는 H와 함께 앉아있는 이 상황에 집중하지 못하고 긴장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제주에 오기 전부터 준비했던 선물을 주기 직전이기 때문이다. 오면서도 괜히 선물의 존재를 들킬까 조심하고, 아침식사를 하러 오면서도 들키진 않을지 조마조마했다. 최대한 무심한 척 H에게 선물을 준다. 혹시나 내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선물을 건네면, H가 억지로 기뻐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어서였다. 다행히 H는 기뻐했지만, 서프라이즈는 실패했다. 이미 다 알고 있었나 보다. 내가 숨기지 못하는 것인지, H가 눈치가 빠른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즐거워하는, 행복해하는 H의 모습을 본 것으로 만족한다는 마음이 든다.


오늘 생일을 맞은 H를 위해 내어 진 미역국 한상도 넉넉하면서도 다채로웠다. 내 몫으로 나왔던 여러 맛있어 보이는 반찬들도 H가 먹고 싶어 하는 듯해서 나누어 주었다. 나는 아무것이나 먹어도 비슷하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은 미식가의 성향을 가진 H에게 주는 것이 우리 둘의 공통된 만족감을 생각해 보면 더 나은 판단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H의 표정을 보는 것이 나는 참 즐겁다.


이 공간이 방문객에게 주는 여유처럼, 나도 언제나 H에게 여유를 주는 사람이고 싶다. 언젠가 서로 바빠지고 힘들어질 때도 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따스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사람이 되련다. 힘들고 지칠 때, 따스하고 여유로운 나의 품이 언제나 가장 먼저 생각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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