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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생 Oct 25. 2024

소중한 사람의 생일을 기억하는 법.

H의 생일은 7월 25일이다.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서 다가오는 그녀의 생일. 사귀기로 한지 얼마 안 되었지만, 생일 전에 차이진 않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져보는 나다. 이번 생일에 어떤 선물을 주는 것이 좋을지 고민을 정말 많이 했는데, 무엇보다 H는 함께 추억을 만들고 싶어 했다. 평소 머물고 싶었던 제주의 장소에 함께 가고 싶다고 한다. H가 말한 그 장소는 나도 꼭 가보고 싶었던 장소다. 존경하는 건축가가 심혈을 기울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H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둘 다 좋아하는 공간을 가게 되어 참 다행이다. 생일 선물로 이 장소를 예약하고, 이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H에게 다른 선물이 필요한지 여러 번 물어보았지만 다른 선물은 필요 없단다.


막상 예약을 하고 보니 어딘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함께 맞이하는 H의 생일인데 H의 마음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 이것은 하나의 강렬한 염원과도 같다.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불안이 나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기에, 이번 H의 생일이 나에게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면, 뭐든 아쉬워진다.


이번 여행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면 그 여행의 밀도를 최대한 높이고 싶을 것이다.

다이어트하기 전 마지막 만찬이라고 한다면, 먹고 싶은 것들을 최대한 많이 쌓아두고 먹기도 한다.

H와 함께 맞이하는 생일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번 생일 여행에서 나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만큼 H에게 잘해주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과 진심을 담아 H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하고 싶다.


H의 마음에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은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과도 맞닿아있다. 나는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는 행위에 깊은 만족을 느낀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쩌면 깊은 무의식 속에서 언젠가 소멸하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모든 생명체가 그렇지만, 나 또한 언젠가는 소멸한다. 이 소멸한다는 감정은 꽤나 서글프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잠시 다녀갔다는 흔적이 잠시라도 남아있길 바란다. 영원할 필요는 없다. 모두가 알아줄 필요도 없다. 내가 바라는 오직 한 두 사람 정도가 잠시, 하지만 깊게 알아주길 바란다. 기억과 추억은 우리의 무의식 속 꽤나 깊은 자리에 파고들어 자리한다. H의 마음 깊은 곳에 나의 발자취를 하나 둘 남겨나가고 싶다.


발자국을 남기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해 볼까. 나를 포함한 보통 사람들의 마음은 사막과 같이 변화무쌍하다. 사막에 발자국을 남기면 각종 바람이나 무언가에 의해 발자국이 덮이거나 흔적이 사라지기도 한다.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모래가 덮이거나 모래폭풍에 의해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리기도 한다. 나의 경우도 그렇다. 그래서 무거운 무언가로 눌러 놓거나 단단한 조각 등으로 의미부여를 해두지 않으면 사라져 버린다. 글을 쓰거나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 나에게는 의미부여의 행위와 가깝다. 특히 글을 쓰면 순간의 기억들은 더 단단해진다. 그런데 H의 마음은 사막이 아니라 마치 달과 같다. 발자국을 남기면 외부의 충격이나 자극 없이는 그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 잘 지워지지 않는 것 같다. 굳이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지 않더라도, 너무 똑똑한 탓인지 그 기억이 잘 남아있게 된다. 이런 H의 마음에 무언가 발자국을 남긴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H의 마음에 무언가를 강하게 남기고 싶다는 생각은 못된 심보일 수도 있다. 이건 나 스스로의 이기심과 욕심에 의한 행동이라는 것을 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진심이 담긴 따뜻한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다.


H의 생일을 어떻게 하면 따뜻한 추억으로 남길 수 있을까. 어떤 선물로 그 순간을 기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평소에 팔찌를 갖고 싶었다는 H의 말이 기억이 난다. 하지만 팔찌를 선물하더라도 그냥 선물하고 싶지 않다. 그 팔찌가 좋은 의미를 담고 있길 바란다. 어떠한 선물이라도, 나와 H에게 좋은 의미를 담고 있는 물건이길 바란다. 함께하는 순간의 어떠한 추억이라도 미래의 H와 나에게 좋은, 행복한 영향을 미치길 바란다.


우리는 과거의 어떤 일을 대할 때, 그 과거가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아들러에 의하면 우리가 과거에 했던 그 경험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는지가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어떤 일에서 성공이나 실패했던 경험 그 자체가 현재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현재의 행동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중대한 사건까진 아니더라도, 내가 하는 선물은 어떤 식으로든 H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영향이 좋은 영향이길 바란다.


선물에 의미를 담기 위해서는 우리의 상황과 배경에 맞는 선물을 선택해야 한다. 나와 H의 주변 상황이나 관계, 앞으로의 다짐이나 의지, 지금까지의 노력에 대한 보상 등이 상징적인 이야기로 연결되는 것이면 더 좋다. 짧은 시간이지만 지금까지 지켜봐 온 바로는 H에게는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다. 특히 가족들을 소중히 대하고 좋은 영향력을 서로 주고받는다. 내가 H옆에 도달하기 훨씬 이전부터 H는 가족들과의 강한 유대관계를 잘 쌓아왔다. 나도 그 강한 유대관계 안에 포함되고 싶다는 희망을 잠깐 품어보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서글프다. H가 가족을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잠깐은 생각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선물을 준비한다.


내가 고른 팔찌는 5개의 반짝이는 구슬이 포함된 진주팔찌이다. 팔찌의 의미는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5개로 특별히 반짝이는 이 구슬들이 H를 포함한 그녀의 가족들이라는 의미를 붙여본다. 주변의 하얀 진주들은 스쳐 지나는 많은 사람들을 뜻한다. 이 진주로 상징되는 많은 사람들 안에는 슬프지만 나도 포함되어 있다. 반짝이는 5개의 구슬 사이에 내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언젠가 나도 H의 옆에서 빛나는, 반짝이는 구슬이 될 수 있을까?


이 팔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생일의 기한을 맞추지 못할까 전전긍긍하고, 어떻게 하면 전달하는 순간에 기분 좋을까를 고민하며 작은 선물상자를 사고, 포장을 하며 좋은 향이 나는 향수를 뿌리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어떤 선물을 한다는 것도 참 오랜만이지만, 이렇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기 위해 절실히 노력한 적이 없다. 그만큼 내가 H를 좋아한다는 방증일 것이다. 부디 H가 좋아해 주길 바라며, 떨리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선물상자의 뚜껑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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