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거의 매일 H의 퇴근길을 함께하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퇴근 후에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급작스러운 일이 생겨 고향에 내려가야 하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오늘은 퇴근길에 함께하지 못한다. 이 소식을 들은 H는 흔쾌히 나를 보내주기로 했다. 그런데 실제로 퇴근시간이 다가왔고, H에게 톡이 왔다.
"혼자 집 가는 길이 허전해요 ㅠㅠ 오빠 없으니까 이상해 ㅠㅠ"
나는 곁에 있어줘야 하는데 같이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한다. H는 조심히 잘 다녀오라는 답장과 함께 쓸쓸하게 혼자 노는 이모티콘을 보낸다. 귀엽다. 이런 사랑스러운 사소한 애교들은 자꾸 내 관심을 H에게 두도록 만든다.
의도했던 일은 아니지만, 허전하다는 말을 듣고는 여행지 로션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평상시에 우리는 로션에 크게 소중함을 못 느낀다. 항상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배송시스템도 잘 되어있고, 올리브영 등 곳곳에 데일리 화장품을 모아 파는 H&B 매장들이 있어 원하는 브랜드를 구하기 쉽다. 그래서 집에서는 로션이 없어서 아쉬울 일이 없다.
그런데 여행지에 로션을 들고 가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평소에는 소중함을 모르다가 여행지에서 가방 안에 로션이 없으면 세수를 하기 전에 불안해진다. 모두의 피부 보습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없어도 생존에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딱히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세수를 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
여행지에서는 H&B 매장을 바로 찾아가기엔 거리가 먼 경우가 있다. 게다가, 세수를 하는 시간은 보통 H&B 매장이 문을 닫은 9시 이후인 경우도 많다. 편의점에서는 자신이 늘 쓰던 브랜드를 찾기 어렵다. 당일 배송으로 주문한다고 하여도 바로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하루를 기다려야 한다. 세수를 마쳤는데 로션이 없는 상황은 그야말로 공포다.
이처럼 H에게는 내가 여행지 로션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로션이 없어도 생존에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생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물건도 아니다. 그런데, 여행지에서의 로션처럼, 내가 없을 때면 가끔, 아주 가끔. 허전해한다면 좋겠다.
그리고 오늘 허전하다고 생각해 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