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연생 Sep 01. 2024

꿈을 꿨다.

아침에 먼 길을 출근하고 있다. 고향에 급히 내려갈 일이 있어 간 밤에는 본가에서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피곤했는지, 버스에서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그만 푹 자버렸다. 그 시간 동안 꿈을 꾸었는데 마음이 뒤숭숭하다.


꿈속에선 내가 H와 헤어지고 있었다. 계속 만나기 위해서는 어떤 물건을 구해왔어야 했다. 그게 있어야 더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물건이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물건은 내가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고, 역시나 깰 때까지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착잡하고도 슬픈 감정이 잔잔하게 남아있다.


나는 이런 꿈을 꾸었다고 H에게 말했다. 쉬는 날인 H도 밤에 꿈을 꾸었단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서 물었다. 그러자 H가 대답했다.


".. 오빠가 다른 여자친구 데려와서 나랑 셋이서 밥 먹었어.."


꿈에서 슬펐단다. 그리고 이런 꿈을 꾼 것이 처음이란다. 나는 슬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나 때문에 밤잠을 설친 것인지 걱정되기도 한다. 그런데 마음 깊은 곳에서는 조그마한 안도감과 함께, H에서 묻어 나오는 조그마한 귀여움을 느낀다. 혹시 나를 좋아하는 건가..?


한 정신과 의사에 의하면 꿈을 꾼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간절한 염원을 반영하기도 하고 무의식에 내재한 불안을 반영하기도 한단다. 나의 경우에는 불안이 반영된 것이 확실하다. 나의 최근 불안은 H로 인한 것 이외에는 없다. 그 불안은 H가 너무 좋아서, H와 함께하는 꿈같은 나의 일상을 잃고 싶지 않음으로 인해 생기는 것.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기준들이 H를 만나고 나서 사라졌다. H를 만나기 전에는 성취가 주변의 사람들보다 더 중요하다 느꼈다. 나의 일이 좋았고, 소소하게나마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사람을 만날 때에도 일을 위해서, 어제보다 더 성장하기 위해서 만났다.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것, 하고 싶어 하는 것 또한 모두 일과 관련 있는 것들이었다. 나의 일은 어떤 신성한 불가침의 영역이라 느꼈다. 나에겐 마치 종교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겐 그 무엇도 신성한 것은 없다. 그 무엇도 중요한 것이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잘 생각해 보자. 사실 그 본질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 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에 있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사랑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각자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혹시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여기진 않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그것을 중요하게 만들 수 있다. 나의 경우가 그렇다. 이러한 생각이 그대로 무의식에 영향을 끼쳐 꿈으로 나타났다는 점이 신기할 지경이다.


더 자세히 적어보면, 내가 무언가 사회적인 성공을 이뤄 부 또는 명예를 성취하려 한다 치자. 부와 명예라는 것이 굳이, 도대체, 왜 필요한가? 그에 대한 스스로의 해답으로, 나의 경우엔 '사람들에게 존중받고 사랑받기 위함'에 있다고 봤다. 사랑받는다는 최소한의 요건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날 좋아해 주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존중을, 존경을,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현대사회에서의 성공이라 함은 결국은 관계에서의 성공과 비슷한 말이라 생각한다. 사회에서의 성공을 이루면, 누구를 만나더라도 관계를 수월하게 풀어갈 수 있는 힘이 있다. 반대로 단순히 생존만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사회에서의 성공을 추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사랑과 존중이 있어도 만족한다면. 만약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반드시 사회적인 큰 성공을 이룰 필요가 있을까? 큰 성공의 기준은 각자 다르겠지만 말이다. 내가 있는 집단 안에서, 적당히 존중받을 수 있는 위치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 것 아닐까?


이 노력이라는 것을 어디에, 그리고 누구에게 사용할지 배분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한 사람'에게 집중할지, 사회와 대중을 상대로 하는 '커리어'에 집중할지 말이다. 누구든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다. 사람마다 수명이 다르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는 각각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한 사람'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의 심정으로는. 만약 나의 인생에 기회가 딱 10번이라면, 고민 없이 H에게 10번 다 쓰고 싶을 지경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회라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를 말하는 것이다. 당연히 누구나 일을 한다. 그런데 누구나 주말 내내, 평일 저녁 자기 전까지 일신경 쓰는 것은 아니다. 이 시간대의 시간과 에너지는 '선택'의 영역이다. 자는 것 이외에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일하는 데에만 투자한다면 당연히 사회적으로 성취를 이룰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이상 일만 신경 쓸 수는 없는 몸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취를 이뤘다고 해도 같이 기뻐할 그 '한 사람'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허한 성취일 뿐이다. 애정하는 그분께서 내가 일을 더 하길 바란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말이다. 다행히도, H는 내가 일 또한 열심히 하길 바란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나는 사회적인 어떤 성공에 대해 어떤 결핍과 갈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나를 더 열심히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게 꼭 부와 명예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죽기 전엔 그맣더라도 어떤 성취를 남기고 떠나고 싶다. 그리고 이 결핍과 갈증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생긴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이룬 어떤 작은 성취들은, H에 눈에는 모자란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나보다 훨씬 잘 나가는, 잘생긴, 멋진 남성들을 충분히 만날 수 있을 텐데. 그런 사람을 많이 만나봤을 텐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나를 만나는 것인지 의문이 생기고, 자꾸 불안해진다.


내가 가진 어떤 결핍으로 인한 불안이 꿈으로 시각화되어 나타난 것은 아닐까. 그리고 혹시나 H가 꿈을 꾼 이유 또한 혹시 불안함이라면, 내가 무언갈 불안하게 했던 걸까.


H가 꿈을 꾼 이유가 혹시 우리가 어제 나눴던 대화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헛된 기대감(자의식 과잉)을 품어본다. 어제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에 H가 나에게 톡을 보냈다. 새로운 누군가가 나의 SNS에 좋아요를 눌렀단다. H는 기분이 나쁜 티를 내진 않았다. 그저 사실을 말하듯 말했다.


 나는 그 말들이 귀여웠다. 이건 마치 나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H가 옆에서 SNS를 하고 있었는데, 얼떨결에 그녀가 어떤 남자의 프로필 사진에 하트를 누르는 장면을 목격한 적 있다. 나는 그 장면에서 분명히 질투심이 들었다. 그 남자보다는 나를 더 바라봐주길 바란다. 그런데 그것은 그저 나의 바람일 뿐이다. 나를 봐주지 않는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떠나가라는 말이 없었으면, 다시 봐줄 때까지 그저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도 한번 기회를 틈타 나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내가 H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그럴 땐 질투심이 담긴 말을 장난스럽게 던진다. 뮤지컬배우 김소현이 조인성과 같이 사진을 찍을 때 손준호가 질투하는 모습을 보인 것처럼 말이다.


질투를 해준 것은 참 고맙고 사랑스럽지만, 나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들어 꿈에 나왔을지 모른다는 것에 미안해서 마음이 쓰인다.


인생엔 기회가 딱 열 번이라면, 고민 없이 너에게 열 번 다 쓰고 싶을 정도야

- Chance, HAAN X Chan -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지 로션 같은 존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