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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생 Sep 07. 2024

잘해주는 이유


H는 주말에 일을 하고 평일에 쉬는 날이 있다. 오늘은 H가 근무하지 않고 쉬는 날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호주에서 온 동생과 함께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한강을 보러 갔는데 나에게 둘이 함께 놀고 있는 사진을 보내준다. 사진 속의 둘은 신나 보인다. 뒤의 배경엔 잠수교의 분수가 떨어지고 있고, 무지개가 피어있다. 친한 자매의 모습이 참 보기가 좋다.


가만 보니, 사진 속의 동생분이 H의 노트북 파우치를 들어주고 있다. 본인도 무거울 텐데 말이다. 이런 모습이 나와 어딘가 닮았다는 생각이 스친다. 지난날 H를 만나면서 했던 나의 행동들이 떠오른다.


H와 내가 함께 데이트를 할 때면, 종종 H의 가방을 들어준다. H의 가녀린 몸에 비해 가방이 꽤 무겁다. 여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가지고 다닐 물건이 많나 보다. 이런 무거운 가방을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나와 데이트를 할 때에는 지속적으로 ‘편안한 몸과 안정된 감정 상태’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편안한 몸과 안정된 감정을 가지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다. H가 다음에 나를 또 찾아와 주었으면, 다음 만남이 또 이루어졌으면 한다. 이 마음은 매번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같다. 조금이라도 나를 찾게 하려면, 나와 있는 순간을 편안하게 느끼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호텔을 편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호텔에서는 쉬는 것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호텔 컨시어지 서비스처럼 모든 것을 다 해줄 순 없다. 그 정도의 어려운 노력이라면, 오랜기간 지속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래도 되도록 나와 있는 상황이 편하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고 싶다. 그러려면 H에 입장에서 자주 생각하고, 배려해주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러한 것들이 있다.


가방을 들어준다. 퇴근할 때, 걸을 때 어깨와 양손이 가벼워지는 경험은 꽤 강렬하다. 짊어지고 있던 짐 덩어리를 내려놓는 것은, 낮 시간 동안 힘들었던 마음도 내려놓고 홀가분한 기분을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다. 일하느라 고생을 많이 해서 힘들어하는 날에 특히, 가방을 들어주면 좋다.


밥을 먹고 나서, 평소에 먹고 싶어 했던 간단한 간식거리를 챙겨준다. H는 간식거리를 찾을 때가 종종 있다. 곤약젤리나 글루텐프리 디저트 같은 가벼운 것들을 주로 찾는데, 기억해 두었다가 챙겨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특히 가방에 소매넣기를 해주면 집에서도 내 생각을 한 번쯤은 더 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라 유용하다. 먹을 것과 관련해서 만큼은, H가 참 단순하다는 사실이 참 좋다. 맛있는 것을 주면 바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래서 챙겨주는 것이 더 재밌기도 하다.


메뉴를 H의 입맛에 맞는 음식 위주로 고른다. 메뉴는 보통 상의 하에 고르는데, 최근의 패턴은 주로 H가 먹고 싶은 메뉴로 고른다. 일단 H가 원하는 메뉴를 먼저 말하도록 한다. H가 대답하고 나면, 나에게 무엇이 먹고 싶은지 물어본다. 나는 다 비슷비슷하지만, 주로 H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 대답한다. 그리고 H의 표정을 잘 살핀다. H가 좋아하는 눈치면 내가 정한 대로 시키지만, 대부분은 H가 원하는 메뉴들 위주로 구성한다. 내가 원하는 메뉴도 먹어 보고 싶다고 말하길래 주문해 봤지만, 나의 경험상 서로 만족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나는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것보다는, H가 맛있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기 때문이다. 내가 살면서 개인적으로 많이 먹어왔던 메뉴(예를 들면 삼겹살 같은)를 고르면 그냥 ‘먹을만하네’ 정도의 표정이다. 배고프니까 잘 먹는 딱 그 느낌이지만, 엄청 맛있어하거나 행복해하는 모습이 아니다. 반면에 H가 고른 메뉴들이나 음식들(주로 양식이나 일식) 앞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그 표정 앞에서는 내 마음도 사르르 녹는다. 이러니 H가 원하는 음식 위주로 주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예전에 나는 단백질을 챙기기 위해 고기가 들어간 종류를 선호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단백질이야 쉐이크로 충분히 보충 가능하기 때문이다. 밥을 조금 먹고, 쉐이크를 한 컵 먹으면 딱 알맞다. 그래서 이젠 아무 메뉴나 별 상관이 없다. 반면 H는 미식가이기 때문에 선호하는 메뉴가 따로 있다. 미식가의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실패하는 일이 거의 없다. 또한 새로운, 몰랐던 맛의 향연을 알게 되기 때문에 좋은 경험이 된다. 취향이 없는 사람이 취향이 있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 옳다. 그게 음식이든, 음악이든, 가구나 인테리어든, 운동이든, 뭐든 말이다.


나와 있을 때 이렇게 편하게 느끼도록 해주는 이유는 단순하다. 다음에도 또 보고 싶기 때문이다. 친구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또 보고 싶으면 잘해주게 된다. 나의 착각일 수 있지만, 이 마음은 동생분도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거운 노트북을 대신, 자발적으로 들어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자발적이라고 해석한 이유는 H가 시켰을 리 만무하기 때문.


게다가, 동생분은 H를 위해서 연어초밥을 사 오기도 한다. 본인이 먹고 싶었을 수도 있지만, 언니에게 초밥을 가지고 가고 있으니 기다리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그분도 H를 많이 좋아하는 것이 확실하다. H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고, H가 본인과 있는 시간을 편안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본디 배려가 몸에 배어있는 분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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