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가 부모님과 대화를 했다고 말한다. H가 현명한 것은 H의 부모님으로부터 기인한 것일 테니 물론 현명한 대화들을 나누었을 것이다.
H는 일하면서 직장에서의 어려운 점과 개선되었으면 하는 점들을 말씀드렸다고 했다. 누구나 일하면서의 어려움이 있지만, 당시 H에게 들었던 내용을 종합해 보면 회사 운영상 현행법에 저촉되는 내용도 있는 만큼 부당해 보이는 사항도 있다. 예를 들면, 연차나 휴가의 보장과 관련된 내용이다. 그녀의 부모님께서는 H를 위해 좋은 조언을 해주셨다. 분명 H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고, 피와 살이 되는 내용이었다. 감히 예상하긴 어렵지만, 부모님께서는 걱정하셔서 또는 더 잘됐으면 하는 마음에 조언하신 듯하다. 나도 그 마음이 이해가 되고 맞는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한다.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지만, H는 그래도 조금 더 마음을 공감받길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한 번에 조언과 공감 모두 만족시킬 만한 대답이란 참 어렵다. 몸에 좋은 약은 쓰기에 삼키기 어려운 법. 성장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받아들여야 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H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런 면에서 부모님의 역할과 남자친구의 역할이 분명히 나뉜다고 생각한다. 나는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분야가 다르기에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보다, 본인의 정보력과 판단력이 더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님 또한 살아오신 세월 동안 많은 경험을 하셨을 테고, 그래서 더 현명한 조언을 해주실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남자친구는 공감은 아주 잘해줄 수 있다. 남자친구의 역할, 핵심가치는 지지해 주는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지지해 주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들을 두고 살아간다. 그 길을 끝까지 가본 사람에게 여러 정보나 조언을 듣는다면, 실질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H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공감과 전적인 지지를 하는 것은 현명한 조언자의 역할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조언자는 더 나은 길로 가도록 인도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가끔은 이견과 설득의 과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조언자가 아닌 나에게는 주어진 정보가 없기에, 좋은 방향이 무엇인지 방향을 확신할 수 없다. H가 가려는 방향에 나의 의견이란 없다. 보편적인 방향도 그렇지만, 무엇이 H에게 이롭고 잘 맞는 결정인지는 더 모른다. 그저 H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잘 결정했겠거니, 믿는 수밖에.
앞으로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개입 없이 스스로 내리는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믿어주고 싶다. 전적으로 지지하고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결정을 믿는다기 보다는 그 사람 자체를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쉽게 흔들려선 안된다. 애초에 완벽한 선택이란 없으며 매일 하는 선택들에는 실수와 후회가 남기 마련이다. 사람을 향한 신뢰에는 이 후회와 실수들을 만회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이 성장하고 더 나아질 것이라는 인식과 기대도 포함되어 있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안정감이 신뢰를 만들고 서로를 전적으로 지지하게 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남자친구로서 나의 존재 가치는 거기에 있다. 그저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것. 잘한 결정이든, 잘못된 결정이든 그로 인해 다가올 파도를 함께 맞고 해결해 나가는 것. 그것이 나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