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나는 걷고 있었고, 차는 나를 향해 달렸다. 나는 딴생각을 하느라 완전히 차를 피하지 못했다. 완전히 빼지 못한 발은 조수석 쪽 바퀴에 밟히고, 사이드미러는 내 옆구리를 쳤으며, 나의 가녀린(?) 몸이 꺾였다. 다행히 정면으로 부딪치진 않았고, 균형을 잡아 넘어지진 않았다. 차에 치인 내 몸 상태를 살펴보느라 정신없는 찰나에, 나를 친 상대 차량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차는 나를 치기 전부터 이미 각종 고난을 겪어온 듯했다. 뒷 범퍼가 찌그러져있어서 트렁크도 닫히지 않았고, 차량 깜빡이를 켜도 뒤쪽에는 불이 들어오지도 않았으며, 기둥에 대놓고 비빈건지 정체 모를 뒷좌석의 스크래치와 찌그러짐, 사이드미러는 발로 찬 건지 앞으로 확 꺾여서 옆이 아닌 정면으로 뻗어 있었다.
어이없다는 생각과 동시에 교통사고의 경험을 이렇게 적게 다치고 해 볼 수 있다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경찰관 두 분과 상대 보험사가 도착했다. 나는 경황이 없었지만, 안절부절못하진 않았다.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되어서 그랬나 보다. 경찰관 분들은 나의 상태를 체크해 주고, 병원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다행히 회사도 이해와 배려를 해주어 감사했다. 병원에 도착하고, 아버지에게 가벼운 접촉사실을 먼저 알렸다. 아버지와는 서로 별 것 아닌 것처럼 가볍게 대화를 나누었다. 사고를 어떻게 처리할지, 어떻게 회복할지에 대해서 간결하게 대화를 했다. 이러한 대화들은 시야가 맑아지도록 해준다.
무엇보다 큰 걱정은, H에게 내가 출근하다가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말은 해야겠고, 걱정을 끼치긴 싫었다. 아직은 H에게는 나의 아픔을 드러내는 것보다 멋있어 보이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큰가 보다. 아픈 모습,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마음 편하지 않다. 나는 H에게 멋있고 쿨한 이미지의 사람이고 싶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하루하루 고민하고 간신히 애를 쓰며 한 발짝 간신히 내딛는 그런 사람이다. 내가 경제활동을 하면서 보이는 이미지들 또한 H에게 보이는 이미지와 별 반 다를 바가 없다. 어느 정도 거리에서 떨어져서 지내는 사람들은 감사하게도, 나를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직업인으로서의 삶 또한 잘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수를 줄이려고 하루하루 발버둥 치며 산다. 하루하루가 어찌어찌 우당탕탕 흘러가는데, 어제보단 무언가 성장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버틴다. 사실 언젠가는, H에게만은 내 속마음과 현실이 사실은 이렇다는 모습을 알려야 하는 때가 올 것이다. 결국엔 내 밑바닥의 모습을 전부 다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내 곁에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나의 단점을 모두 보게 되더라도, 잠시 견디기 힘든 순간들이 있더라도, 다시 한번 함께 나아가고 도전할 수 있는 그런 편안하고 잔잔한 사람과 오랫동안 함께하길 바란다. 그래야 주위의 모든 일이 힘들고 지치더라도, 서로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수월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심리학자인 조던 피터슨은 한 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상대와 뜻밖의 일이 생겼을 때 얼마나 화를 내야 하는지를 잘 결정해야 한다. 잘못할 때마다 헤어져라고 말하는 삶은 정말 끔찍하다. 그렇게 살면 누구든 자신의 잘못을 절대 인정할 수가 없다. 어차피 함께여야 한다면, 도망갈 수 없으니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함께하는 남은 세월 동안 싸움만 하게 될 것이다.”
나의 실제 모습과 삶이 이렇게 우당탕탕 흘러간다는 것을 알게 되면 H가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가끔 한다. 그 상상은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미 많이 실망시키기도 했지만… 앞으로 나에게 실망할 날은 함께할 날과 비슷하게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마음에도 불구하고, 말은 해야 한다. 실망하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 실망은 내가 오롯이 감당해야 할 일이다. 걱정과 긴장, 혼날 각오를 무릅쓰고 H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아무것도 모르는 H가 즐겁게 전화를 받는다. 나는 잘 잤는지 안부인사를 한다. 잘 잤다는 말에 나는 놀라지 말고 들으라는 말을 덧붙이며 최대한 웃으면서 말한다.
“나 아침에 자동차랑 부딪혔어”
다친 데는 얼마 없고, 사고 절차도 잘 처리했으며, 회사에도 잘 말했고, 어쩌고 저쩌고를 속사포처럼 늘어놓는다. 나는 잘 있으니 걱정 말라는 마음이다. 연락이 안 되면 걱정할 테니, 현재 나와 가장 가까운 상태인 여자친구에게는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며 약간은 별생각 없이 가볍게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H는 나의 말을 듣자마자 많은 걱정을 해준다. 쉬는 날이었던 H는 약속을 잠시 미루면서까지 나를 보러 와주겠다고 말했다.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 말이 참 고맙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내가 사고가 난 것이 처음이라 그랬는지, 누군가가 아끼는 특별한 사람이 된다는 기분이 참 좋았다. 실제로 무언가 물건을 받는다거나 그런 것보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든든했다.
누군가는 이 모습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겐 당연하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나도 이런 아픈 사람이나 힘들어하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챙겨주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데, 찾아간다거나 무언가를 챙겨준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챙기기 위해선 당연히 진심이 들어있어야 한다. 이러한 진심을 담는 것엔 참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기에 나는 불특정 다수에게 진심을 쏟는 게 어렵다. 가까운 사람에게도 물론 진심을 쏟아야 하고, 그것을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겐 진심을 쏟아야 하고, 이 한정된 에너지를 한정된 사람들에게 더욱더 집중하고 싶다.
병원진료를 들어가기 전, H가 나와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내가 있는 근처로 와주었다. 사고 직후라 경황이 없어서인지, 무언가 어지럽고 메스꺼우면서도 입맛이 없었다. 하지만 H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정말 힘이 된다. 간단하게 먹고 싶어서 초밥을 먹자고 했다. 샐러드도 먹고 싶었는데, 도저히 그 아삭하고도 푸짐한 것들을 씹고 넘길만한 컨디션이 아니었다. 간단하게 먹기 위해 판초밥을 주문했다. 작은 초밥들이 참 맛있었다. 사실 그 초밥집은 엄청 좋은 재료를 쓴다거나, 비법이 있다거나 하는 식당은 아니었다. 그런데 H의 그 마음이 고마웠다. 그래서 훨씬 더 맛있게 느껴졌다. 밥알 한 알 한 알을 음미했다. 얼마 전 다녀왔던 고급 스시집보다도 훨씬 좋게도 느껴진다. H가 배부르다며 나에게 유부초밥을 하나 더 건넨다. 어릴 때부터 유부초밥을 좋아해서 자주 먹던 것은 또 어떻게 알고.
밥을 먹고 나서 경황이 없는 중에도, H는 나의 곁에서 병원에 접수하고 검사와 진료를 받는 과정을 지켜봐 주었다. 사실 혼자서도 다 할 수 있는 과정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든든하면서도 계속 H를 찾게 된다. 진료를 받고 나오면서, 검사를 받고 나오면서 한 번씩 흘깃거리며 H를 쳐다봤다. 나도 모르게 의지하고 있었다. 옆에 있든 없든 진료와 회복에 영향을 주진 않을 텐데, H가 있고 없고에서 전혀 다른 차이가 느껴진다.
병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의료진과 더불어 ‘보호자’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보호자가 주는 안정감은 실로 엄청나다. 이 안정감에서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샘솟고 그 의지는 빠른 회복의 눈덩이를 굴려나간다.
나도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작은 소망이지만, 내가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H와 그 주변 가까운 사람들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