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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생 Aug 15. 2024

초량, 비어있는 얼음그릇과 같은 마음.

초량. ‘풀밭의 길목’이라는 뜻이란다. 부산 동구에 위치한 한 작은 마을의 이름이다. 이름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감성적 향기를 풍긴다. 이곳에서 H와 나는 작은 추억을 만난다.


H는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청포도샐러드 맛집을 소개해주겠다며 손목을 잡고 이끈다. 부산에 오기 전부터 H에게 30번 넘게 소개받은 바로 그곳이다. 나는 양산을 H의 머리 위에 띄워 놓은 채로 손목을 잡혀 끌려간다. 30분을 웨이팅 해서 들어간 샐러드집은 사실 크게 기대 안 했다. 그저 H가 좋아하는, H의 취향인 식당에 간다는 사실이 궁금했고, 즐거웠다. 기대하지 않았던 오일파스타와 청포도 샐러드는 의외로 천상의 맛이었다. 무겁지 않게, 가볍게 포만감을 채워주는 샐러드에는 ‘한 꼬집의 달콤’과 ‘한 움큼의 상큼’이 있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 ‘둘’을 정말 맛있어하는 우리 ‘둘’은 마치 발우공양을 하듯 샐러드 볼을 건강한 채소로 싹싹 긁는다.


적당한 포만감에 기분이 좋다. 마침 폭우가 예상된 부산은 화창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관광객들이 적어 쾌적하다. 후식으로 음료를 먹기 위해 우유를 파는 카페를 찾았다. H는 우유를 참 좋아한다. 모든 케이크를 우유와 함께 먹는단다. 달달한 무언가를 우유와 함께 먹는다는 것은 상상해보지 못했다. 입안의 달달함이 고소한 우유와 섞여서 내는 맛이 좋다나. 디저트를 우유와 같이 먹는 것을 처음 들어봤다고 하니 자신의 주변들은 모두가 그렇다고 했다. 반대로 나는 항상 커피와 먹었다. 달달함으로 가득 찬 나의 입을 쌉싸름한 커피의 향으로 씻어내려가는 깔끔함이 나는 좋다.


우유를 찾는 H를 위해 찾은 바로 그 장소는 초량 1941. 초량동의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해, 카페로 변화시킨 공간이다. 적산가옥이란, 일제강점기에 적(敵 , Enemy)이 만든 집이란 뜻이다. 1941의 뜻은 1941년에 지어진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했다는 의미이다. 일본인이 만든 집이기에 일본풍의 요소들이 많이 남아있다. 아픈 역사이지만, 아픈 상처에서 오히려 배울 점들이 많은 만큼 구석구석을 둘러볼 가치는 충분하다. 일본 요소들을 활용해 브랜딩 된 공간이라 그런지 우유에서도 특유의 일본 문화가 느껴진다. 일본에는 화산이 많아 온천 문화가 발달해 있다. 온천을 하고 나오면, 병 우유를 많이들 마신다. 이곳의 우유병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종이 포장 덮개에 노끈으로 묶여 있었다. 마치 조선시대의 한약재를 포장하듯 말이다.


다만 이곳의 우유는 H의 입맛엔 달았다. 마침 우유를 시원하게 마시고 싶었던 우리는 얼음컵을 받아 너무 달콤한 우유를 중화시키기로 한다. 쌓여 있는 각얼음들에 닿은 진한 우유는 빠르게 그들을 녹여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얼음들은 안쪽부터 녹는다. 그때, H가 말했다.


"이거 내 마음 같아. 안쪽이 비어있잖아."


안쪽이 비어있는 마음에는 다른 것들을 품을 수 있는 힘이 있단다. 생각과 고민으로 가득 찬 무언가는 다른 것을 담을 여유 공간이 없다.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품기 위해, 일부러 마음속에 공간을 남겨둔다며. 듣고 보니 나는 무언가에 과도하게 집착함으로 인해 주변을 돌볼 여유가 없었나, 되돌아보게 된다. 현대 일상의 각박함은 많은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가끔은 곁의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한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과도한 전문화와 생산성에 대한 집착 때문에 만들어진 사회의 분위기일 수 있다. 효율과 빨리빨리를 추구하는 것은 좋지만, 잠시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는 시간 또한 소중할 수 있다.


집에 가자며 일어서는 H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천천히 따라나선다. 다소 엄격한 면도 있다고 생각했던 H가 ‘나의 완전하지 못한 모습 또한 약간은 품어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해선 안 되는 기대를 조금은 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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