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연생 Aug 17. 2024

밥 잘 사주는 귀여운 아저씨

 내가 적었지만 다시 봐도 이상한 제목이다. 귀여운 아저씨라니. 아저씨가 귀여울 수 있는 것인가. 그런데 실제로 H에게 여겨지는 나의 포지셔닝은 딱 ‘밥 잘 사주는 귀여운 아저씨’ 즈음이다. 보통 잘생기지 않은 남자에게 '귀엽다'는 표현을 한다나. 나는 이러한 포지셔닝이 딱 마음에 든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잘생긴 동생 정해인을 어떻게 사로잡았는지는 드라마를 안 봐서 잘 모르겠다.


 어느 날, H와의 약속이 없는 날에 친한 스타트업 대표님과의 약속 장소에 나간 적 있다. 그분은 항상 일에 미쳐계시지만, 이상하게 나를 만나면 연애 얘기를 한다. 나도 평소에 연애 얘기를 하진 않지만 이상하게 그분을 만나면 연애 얘기를 하게 된다. 적당히 사적인 얘기이지만, 주변 지인들에게는 할 수 없는. 나와 연결된 지점이 전혀 없기에 오히려 마음 터놓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장소에서 대화를 꽤 오래 나눈 것으로 기억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그가 그의 여자친구에게 했던 “내 배는 곯아도 너 하나만큼은 안 굶게 해 줄게.”라는 말이다. 나는 아저씨이지만 진정한 남자인 그분의 말이 참 든든하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밥을 챙겨준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물질을 제공하는 것으로 치부할 수 없다. 따끈한 쌀밥, 그 너머엔 조금 더 따스한 온기가 담긴 무언가가 있다. 그의 말은 꽤 오랫동안 나의 마음에 남았다. 그동안 ‘굶지 않게 해주고 싶다’는 말은 ‘먹는 문제로는 걱정하지 않게 해주고 싶다’는 말로 변해있었고, 나의 연애 신조가 되었다.


인간은 고민하는 동물이다. 우리 모두가 수많은 것들을 고민하고 결정하는 삶을 산다. 작게는 ‘오늘 뭐 입지’부터, 크게는 ‘뭐 해 먹고살지’까지. 물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고민하는 일에도 굉장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 특히 미식가인 H는 먹는 것을 참 중요하게 생각한다. 전식부터 본식, 후식까지 완벽한 식사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그 고민을 할 때의 표정이란 사뭇 진지하고 의연하다. H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자, 숭고한 일인 이유다.


하지만 H는 먹는 것 이외에도 고민할 거리가 많은 사람이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분명히 있지만 ‘어떻게’를 확정 짓진 않았다. 게다가 타고난 성향이 신중하여 고민을 꽤 오래 하는 편이다. 거기에 하루에 3번 하는 식사 고민까지 신중하게, 치열하게 한다면 하루의 끝에는 스스로를 위한 깊은 고민거리를 정리할 에너지가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그런 H가 적어도 먹는 문제에서는 자유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먹을 걱정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식비에서 자유롭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더 포괄적인 의미다. H의 걱정이 줄어들게 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덜 하게 하면 된다.


최근에 자주 하는 H의 고민으로 예를 들어보자. 8시에 퇴근인 H가, 8시 반까지인 파스타집 ’라스트 오더 시간을 못 맞추면 어떡하지?’라는 고민을 한다. 요즘은 내가 먼저 퇴근하기에 먼저 가서 웨이팅을 걸어두는 방법으로 해결하고 있다. 하지만 방법이 그것뿐인 것은 아니다. H가 쉬림프오일파스타를 먹고 싶다고 할 때 간단히 사 줄 수도 있지만 요리를 직접 해 줄 수도 있다. 처음엔 직접 해주는 요리가 맛없으면 ‘어떡하지’라는 고민을 잠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문제는 남자라면 응당 극복해야 하는 법. 요리는 '삼시세끼' 차승원처럼 간지 나고 터프하게 시도해야 한다. 조금 덜 전문적 일진 몰라도 하다 보면 H의 입맛에 쏙 맞는 레시피를 찾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밤늦게 퇴근더라도 시간과 관계없이 언제든 대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루 24시간 중 H가 가장 많은 고민을 하는 주제 중 하나는 ‘어느 식당을 가지’와 ‘어떤 메뉴를 시키지’다. 식당을 고른다고 끝이 아니다. 식당에 들어가서 호출벨을 누르기 직전까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메뉴들이 그녀의 간택을 받는다. 고민은 신중하게, 오래 하는 것이 좋다. 다만 그것이 걱정이 되지 않도록 옆에서 잘 서포트해야 한다. 걱정이 되지 않으려면,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의 취향이 없어야 한다. 혹여나 ’내가 고른 메뉴가 이 사람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고민하는 이유는 오롯이 H 스스로의 만족감을 위한 고민이어야 한다.


장을 볼 때에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은 1주일간 뭘 해 먹지에 대한 것이다. H가 ‘맛없거나 건강하지 못한 식사 시간이 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도록, H가 좋아하는 건강한 식재료로만 장바구니를 채워야 할 것이다. 잊었다가도, '언제든 편안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곳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도록.


먹기 전 식재료를 생각하는 것부터, 먹은 후에 정리하거나 설거지하는 것까지. 먹을 것에 대한 고민 근처에 있는 모든 요소에서 걱정이 없는 상태여야만 ‘먹을 걱정에서 자유롭다’라고 비로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H는 먹고 싶은 것이 참 많은데, 좋아하는 모든 것을 전부 사줄 순 없다. 그럴 때마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가장 먹고 싶은 걸 딱 하나만 골라봐.”


그 순간 H의 눈이 반짝인다. 무엇을 골라야 ‘잠시 후의 자신’이 가장 맛있어할 경험, 후회하지 않을 경험을 하게 될지 신중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히레카츠와 우니파스타, 사케동을 함께 해치우고 오는 길. 오늘은 H가 아이스크림 츄러스와 초코딥 세트를 후식으로 골랐다. 오늘도 근처 벤치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달달한 10분을 함께한다.

이전 12화 초량, 비어있는 얼음그릇과 같은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