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끝에 우리가 함께하는 방법 중 하나는,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이다. 서로의 말이 오가다 잠깐의 침묵이 머문다. 그리고, 나지막이 H가 한숨을 내쉰다.
감성적이고 섬세한 H는,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도 깊은 감정과 생각이 묻어 나온다. 그 감정과 생각을 알고 싶다. 내가 그녀의 한숨 하나에도 의미부여를 하게 되는 이유다. 오늘 고된 하루를 보낸 것인지, 누워있는 이불속이 포근했던 탓인지, 내일 다가오는 근무가 부담이 되는지 궁금하다. 나는 평소에 대세에 영향을 주지 않는 작은 것들은 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디테일보다 전체적인 흐름과 방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H에 관한 모든 것은 작은 사소한 모든 것들이 눈에 밟힌다.
밥을 먹을 때 깨작거리면. ‘아, 배가 부르구나.’
음식을 입에 넣고 갑자기 미소 지으면. ‘아, 음식이 입맛에 맞는구나. 이 메뉴는 기억해 놔야지.’
입을 오므리고 눈이 감기며 하품을 참으면. ‘아, 피곤해서 집에 들어가고 싶구나.’
말로 잘 표현해주지 않는 만큼, 행동이나 표정에서 그날의 컨디션과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세심하게 보아야 한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퀴즈처럼 맞춰본다. 자주 틀리지만 가끔 H의 속마음을 맞출 때의 쾌감이란…!
H의 옆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녀가 보는 시선을 따라가게 된다.
매일 걷는 길에서 보지 못했던 강아지풀을 본다.
커피숍 입구에 매달려있는 코알라 인형을 본다.
계산대 옆에 올라간 발리에서 온 거북이 나무조각을 본다.
그녀의 발길이 멈춘 곳,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에 나 또한 머문다.
그리고 그 기분은 썩 좋다.
반짝이는 주변의 작은 것들의 소중함과 그것에서 오는 기쁨을 아는 H다. 그녀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주변 사소한 것들에서 오는 기쁨에 대해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정확한 표현은, 그들은 정이 없다는 것. 사소한 기쁨에서 오는 정을 스스로에게 주고, 남에게도 기꺼이 주는 마음. 정이 넘치는 사람이 사회에서도 성공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단다. 그런데 오늘 머리를 하러 간 미용실에서 읽은 한 에세이에서 그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고 한다.
차홍이라는 분이 쓴 에세이인데, 그분 또한 사소한 것들에서 오는 기쁨과 소중함을 잘 아는 사람이다. 이외에도 자신과 비슷한 것이 많아서 공감되었단다. 어릴 적부터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이었는데, 주변 사람들은 착하고 의젓하다고 평가했다고. 본인은 다리 밑에 버려질까 두려워 다른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자신이 정말 착해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단지 눈치를 과도하게 많이 보는 사람일 뿐이었던 건지 헷갈린다고. 그러한 모습들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했다. 분위기를 잘 파악하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잘 캐치하는 능력을 활용해서 헤어디자이너라는 직업으로 성공한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내향형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능력의 강점을 이해하고 활용한다면 충분히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H는 자신이 선택한 분야와 직업보다는 ‘어떻게’ 이뤄가는지가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존경하는 천문학 연구자 또한 그 분야에서 얼떨결에 손을 들고 지원해서 한 행성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차홍 또한 착실하게 살다 보니 자신과 잘 맞는 헤어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됐다고. 어쩌면 자신이 일하고 있는 분야에서도 ‘지금 이 일을 하는 게 맞을까’라는 생각보다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게 좋겠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이룬 성과는 분야를 막론하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 완성해 나갔는지가 중요하다는 것. 그것이 사업적이든, 학술-연구적이든 접근 방법은 물론 다르겠지만 말이다.
오늘은 내 생각을 덧대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H의 생각을 남기고 싶다. 나는 H가 얻은 해답 자체도 정말 좋았지만, 그녀를 눌러왔던 어떤 무거운 이야기가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아서 나도 마음이 덩달아 가벼워진다. H의 삶을 오래도록 곁에서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