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아이스크림을 먹던 H의 뜬금없는 말에 기뻐하는 나를 본다. H는 내향인이라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 대화를 하다 보면, 대개 이런 식이다.
”몰랐어. 오빠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 “
“뭘 몰랐는데?”
“그건 나중에 얘기해 줄게.”
이러한 대화 패턴이 처음엔 나를 미치고 환장케 했지만, 점점 익숙해진다. 가끔은 이러한 모습이 귀여워 보이기조차 한다. 이어서 듣고 싶지만 당장 들을 수 없는 이유는 매번 다르지만 명확하다. 졸려서 자야 하니까, 후식을 맛보는 데에 집중해야 해서, 지나가던 강아지가 귀여워서. 서로의 생각과 가치관을 나누는 행위보다, 지금 이 순간의 작고 반짝이는 모먼트를 누리는 게 중요한 것. 생각을 나누는 것은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에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면 H와 함께 지금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저번에 하려던 얘기’ 또한 어쩌면 지금의 감정을 기억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H는 나에게 ‘인터스텔라’ 영화를 보았는지 물어본다. 인터스텔라가 나온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니. 감상한 지 오래되어서 어떤 장면을 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장면은 하나다. 서재의 뒷 공간에서 딸에게 선물한 시계에 모스부호를 보내는 장면. 4차원의 시공간의 세계에서 3차원의 공간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바로 그 장면이다. H는 우리의 일상을 4차원의 세계와 3차원의 세계로 나누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잘 공감하지 못한다. 그녀의 내면은 내가 볼 수 있는 세계보다 훨씬 고차원이기 때문에 내가 인지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내가 보는 세계는 3차원이어서, 시간의 영역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H의 4차원의 내면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H는 ‘라티’라는 강아지를 잠시 임시보호했던 순간이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따뜻한 온기로 숨을 쉬는 라티와의 추억이 깊은 감정으로 남아있다. LA로 라티를 떠나보내는 순간에는 너무나 슬퍼서 견디기 어려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라티에 관한 기억이 흐려진다. 보고 싶어도 임시보호를 했던 사람이 라티를 만나는 것은 규칙상 허락되지 않는다. 너무나 슬펐지만 라티를 계속해서 생각하던 어떤 순간에 떠오른 개념이 있다. 인터스텔라처럼 4차원의 어떤 시공간에는 라티와 함께했던 그 모먼트가 정확하게 존재한다. 자신이 현재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 미래에 있더라도, 정확하게 그 시간과 공간에는 라티와 함께했던 좌표가 남아있는 것이다. 그 좌표로 되돌아가면, 언제든 라티와 재회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덜 슬프단다.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H는 관용적으로 흔히 부르는 4차원의 인간이 아니다. 실제 H의 내면은 보통의 인간과는 다르게, 4차원으로 기능한다. 3차원에 머무는 나의 차원과는 개념부터 다르다. 시간의 흐름 속에 사는 나는 오히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슬프다. H와는 반대로 나는 시간의 흐름을 역행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가졌다. 잊히는 것, 잊어가는 것을 슬퍼하고 받아들인다. 아무리 이렇게 글을 남기더라도, 이 글은 그 순간의 잔상일 뿐이다.
4차원의 시공간을 이해하고 공감하기란 어렵다. 그저 그 느낌이 어떨지 어렴풋이 예상할 뿐. 인터스텔라 음악 중 ‘Cornfield Chase’를 들으면 조금 더 그 느낌에 가까워진다. 그저 실체가 없는 ‘느낌’ 뿐일지라도. H가 그 좌표로 돌아갈 때에는 이런 마음이 들려나.
a little older, a little wiser, but happy to see you. 조금 더 늙고, 조금 더 현명해지겠지만, 널 만나 반가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