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연생 Sep 23. 2024

기다림과 책

부산에는 H의 원래의 일정이 있었다. 바로 얼마 전 새로 사귄 친구를 만나는 것. 부산에 친구를 만나러 여행을 떠난다기에, 내가 같이 가고 싶다고 졸랐던 것인데 결국 잠시 이별해야만 하는 순간이 왔다. H는 그 친구와 요트를 타고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H가 광안리의 멋진 풍경을 즐기고 있는 동안 독립서점엘 다녀오기로 다. 독립서점을 가는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H에겐 비밀이지만, 사실 독립서점엘 혼자 찾아가고 책을 사본 적이 없다. 가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이다. H가 가보고 싶어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내가 혼자라도 다녀오겠다 하니 H가 많이 아쉬워한다. 아쉬워하는, 아련한 표정에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책이라도 한 권 선물해주고 싶었다.


"책 한 권 선물해 줄까~?"


"그럼 난 좋지~ 오빠가 내 취향 맞춰서 잘 선물해 봐."


H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H는 여러 가지 기준을 말해주었다. 먼저 자신만의 전문 분야가 있는 사람의 책이길 바란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가 배울만한 점이 있는 사람이길 바랐다. 너무 일상만을 담은 책이 아니라 삶에 도움이 되는 책이길, 그래도 너무 무겁진 않은 책이길 바랐다.


H의 표정은 '과연 네가 날 만족시킬 수 있을까? 어디 한번 선물해보거라'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과연 독서를 많이 하는 고수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독립서점 앞에 섰다. 긴장되고 두근대는 순간이다. 이곳에 방문했다는 인증샷을 H에게 남기고 서점에 들어선다. 내가 고른 책이 부디 지적이고 현명한 H의 눈높이에 맞아야 할 텐데.


들어서자마자, 안내 표지판에 생일책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일책이란 초판본이 처음 나온 날을 말하는 것이다. 책마다 모두 생일이 있고, 무슨 책인지 알 수 없도록 안 보이게 포장해 두었다고 했다.  선물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지만, H의 취향을 맞춰야 한다는 부담감에 나의 눈과 다리은 생일책이 꽂힌 곳으로 향한다. 생일책은 맨 아래칸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7월 25일에 맞는 생일책을 선물해 볼까? 괜히 쉽게 가는 길을 선택해 감동이 줄어드는 건 아닐까..'


그런데 7월 25일의 생일책이 마침 자리에 없다. 참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만약 있었다면 그 앞에서 블라인드 책을 선물할까 말까 고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도전하기로 한 만큼 제대로 마음 써서 고르고, 만약 실패하면 미움 한번 받고 다음에 다시 한번 도전해 보자는 마음을 굳게 먹어본다. 그러면서 허리를 펴고 일어났는데 검은색 표지의 눈에 띄는 책을 발견했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문득 책을 꺼냈는데, H가 설명했던 그 취향의 책이다. 엄마로서 살아가면서도 자신이 하는 일, 천문학자로의 전문성은 놓치지 않으려는. 한 인간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였다. 어찌 보면 H의 인생 선배로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일지 몰랐다. 이렇게 생각하니 짧게 펼쳐 읽었던 많은 글들이 나의 마음을 울렸다.


주변의 다른 책들을 모조리 펼쳐 읽어보았지만,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천문학자의 글만큼 마음을 울리는 글들이 없다고 느껴졌다. 얼른 H에게 책 선물을 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확신은 없었지만, 왠지 H의 취향에 맞을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책을 돌려주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 기다려야만 했다. 저녁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왠지 모르게 밥은 먹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밀락더마켓 스타벅스에서 음악감상을 하면서  그 당시 읽고 있던 책을 정리했다. 통계와 경제 관련 책이어서 읽는 재미도 있었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중간중간 드론쇼를 한다고 하여 잠시 바깥공기를 쐬면서 H가 있을 해변 바다 건너의 레스토랑 방향으로 힐끔거렸다.


해가 지고 나서도 시간이 훌쩍 지난밤, H가 약간은 피곤한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다. 파란색 원피스를 입은 H가 잠깐 광안리 해변에서 야경을 구경하고 가자고 한다. 바닷바람에 H의 머릿결이 날리고, H는 밤바다를 바라본다. 나는 그런 H의 뒷모습과 바다를 번갈아가며 바라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고이 숨겨두었던 책을 H에게 공개한다. 긴장되는 순간이었지만, H는 내가 긴장해 있는 줄 모르고 있다. 책을 받아본 H는 밀리의 서재에 담아두었던 책이라며 반가워한다. 그 무엇보다도, H의 취향을 맞췄다는 사실이 나에게 안도감과 성취감을 준다. 이것은 미뤄두었던 숙제들을 모두 해치운 느낌, 큰 이사를 끝마친 느낌과 비슷하다.


아무래도 H를 기쁘게 하는 일이 내가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인가 보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겹친다는 것도 복인데, 아무래도 나는 성공한 덕후인 듯하다.


작가의 이전글 럭키비키잖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