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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생 Sep 17. 2024

노을과 바다


KTX를 타고 오는 내내 걱정이 많았다. 비가 많이 올 예정이라는 일기예보에, 일정이 있어 꼭 와야만 하는 H도 부산에 오는 게 맞는지 고민을 했을 지경. 나는 여행에서 가장 많이 남는 것은 의식의 기억보다는 감정의 기억이라는 생각을 한다. 혹시나 이번 여행에 비가 많이 와서, ‘좋은 감정보다 고된 감정이 많이 남으면 어쩌나’하는 우려로 안절부절못한다. 최상의 경험과 기억을 하길 원하는 H에게, 부산에서의 기억이 좋은 감정으로 남았으면 했다. 다행히 내렸을 때의 날씨는 흐렸지만 비가 떨어지진 않았다. 폭우가 예정되어 있었으니 이 정도면 아주 훌륭했다. H는 날씨 요정이다. 아무리 날씨가 좋지 않더라도, 이동하거나 밖으로 나갈 때는 비를 잠시 그치게 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런데 H는 바다가 보이는 수영장에서 사진을 찍을 때 햇살이 없어 예쁘게 나오진 않을 것 같아 걱정한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우산이 없으면 없는 대로 무던하게 비를 맞고 다니던 나는. 마음대로 날씨를 조정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본다.


카이센동과 히츠마부시라는 이름의 장어덮밥을 나눠먹고, 사진 찍기로 했던 예쁜 바다뷰의 수영장으로 이동했다. 역시 사람은 밥을 먹어야 긍정적인 마음이 든다. 날씨가 좋지 않더라도 열심히 찍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생각보다 강렬한 햇살이 비춰 다행이다. 햇살이 눈부신 오후 H의 사진을 찍어주는 일이 즐겁다. 음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H도 기분이 좋은 눈치다. 진짜 맛있긴 했다.


사실은, 나는 계속해서 긴장해 있다. H와 서울과 떨어진 곳으로 왔다는 사실이 들뜨기도 하면서 나의 어떤 모습을 마음에 안 들어하진 않을까, 그래서 떠나가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말이다. 사진이 어떻게 나오는지도 모른 채 다양한 각도와 구도로 아이폰에 H를 담는다. 어떻게 나오는지 몰랐던 건 H도 마찬가지다.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화면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가 지친 우리는 아무도 없어 우리 둘 뿐인 따뜻한 야외 온천에서 몸을 녹인다. H는 노을을 좋아한단다. 노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함께 기다리는 시간이 느긋하게 느껴진다. H는 그 순간이 빨리 오길 바라는 눈치다. 노을이 지는 풍경과 그 순간의 아름다움에 대해 계속해서 설명한다. 나는 이 시간이 더 느리게 흘렀으면 한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우리 둘만 넓은 야외에 덩그러니 놓인 이 느낌이 좋았다. H의 수영복에 달린 리본이 부풀어 돌고래처럼 귀엽게 느껴진다. H가 나의 얼굴을 계속 관찰하고 바라봐주고 있다. 나는 왠지 기분좋아진. 쌍꺼풀이 어쩌고, 피부가 어쩌고 하며 나의 상태가 어떤지 체크해 주는 느낌이다. 그저 나를 계속 바라봐준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심한 관심을 받는 순간이 나에겐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야속하지만 시간은 계속 흘러 어느덧 노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야 하는 시간이다.


노을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H의 마음엔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눈치다. 내가 볼 땐 정말 예쁜데 말이다. 분명 집에서 다시 보면 느낌이 다를 것이다. 사진을 찍는 데에 흥미를 잃었는지 함께 노을을 바라보자고 한다. 우리 둘은 한동안 서로 아무 말 없이 노을을 바라본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이렇게 말이 없어본 적이 별로 없다.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오랜 침묵을 깨고 H가 나에게 말했다.


“노을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는 게 느껴져.”


H는 노을을 볼 때면 오늘 하루가 저물어간다는 생각에, 지나온 하루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된다고 한다. 그러다 보면 하루라는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진단다. 그러다 보면 이틀도, 일주일도, 1년도 빠르게 지나는 것처럼 느껴지고 아득하기만 한 미래의 긴 시간도 어쩌면 금방 지나가버렸다는 생각이 들지도. 100살 먹은 할머니가 되어서 추억을 떠올리고, 생각보다 빠르게 흐른 시간을 아쉬워할 수도 있겠다고. 나는 이 말에 우리가 앞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남아 있다고 답한다. 비록 빠르게 흘러 짧게만 느껴지는 순간들 일지라도, 그 순간마다 우리가 하게 되는 일들이 있고 그것들이 모두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이 순간의 나는 미래에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100년 후에 할아버지가 된 내가, 단 하나의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바로 지금 이 순간으로 되돌아오길 선택한 기분. 미래의 내가 '지금은 값진 순간이니 절대 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노을의 색은 우리의 시간을 잠시 느리게 흐르게 한다. 매일의 색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노을의 색에 매료된다. 노을을 바라볼 땐 열심히 생각하고 움직이던 우리의 마음이 잠깐 비워진다. 주위 환경과 사람들,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공간이 생긴다. 이러한 여유공간을 가지는 느낌이 좋다. 앞으로 달려야만 하는 성향을 가진 나이지만, 눈을 가린 채로 달리고 싶진 않다. 지금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길 위인지, 러닝머신 위인지, 같이 달리는 사람은 누구인지 끊임없이 바라봐주어야 한다.


여행 초반부터 나를 옥죄었던 긴장이 약간은 느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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