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와 처음 데이트를 하던 날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드는 생각이 있다. H는 여리고 보호받는 공주로 자랐다. 나는 지금까지 독립적이고 당찬 현대 여성들만 봐왔다. 요즘 같은 시대에 안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을 하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저 그녀를 관찰하다 보면 칭찬도 비판도 아니고 딱 '공주 같다'는 결론에 이른다. 뭐 어떡하랴. H가 공주 같은 걸. 당차고 자기 주도적으로 치고 나가는 그런 디즈니 첫째 공주 같은 느낌은 아니고, 얌전하고 조용한 둘째 공주 같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만나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얌전한 공주 같은 느낌을 내가 좋아하나 보다.
H를 공주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이유는 여럿 있다. 실제로 안 그럴 수 있지만, 내가 보는 1인칭 시선에서 묘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연약하기에 곁에서 챙겨줘야 한다. 건강한 사람인건 맞지만 잔병치레가 가끔 있다. 그래서 자주 아픈 게 습관인지 스스로의 몸 상태를 매일 체크하고 병원에도 자주 다닌다. 그 덕에 혼자서도 오래 살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든다. 아플 때 힘들어하는데 대신 아파주고 싶다. 근데 이런 건 나 말고 주변 사람들도 그런 마음인가 보다. 나의 착각일 수 있지만 누군가 곁에서 챙겨주는 게 익숙한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 부모님께서 어릴 때부터 잘 챙겨주셨던 것 같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주 부족하다.
둘째로, 대부분의 움직임에서 느림의 미학이 느껴진다.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가 없다. 수저를 집을 때도, 무언가를 주거나 건네받을 때에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때도, 심지어는 눈을 깜빡일 때에도 천천히 움직인다. 이 특유의 움직임에서 어떤 여유의 분위기가 풍긴다. 살아가는 데에 풍파와 고민을 겪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누구보다 고민과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그저, 풍기는 아우라가 그렇다는 것이다. 분위기와 아우라는 인간의 내면과 가치관, 생각에서부터 나오기에 따라 하려 해도 쉽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셋째로,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생각회로를 가졌다. 무언가를 얘기하면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딪치게 될 일이 없다. 이 주제에 관해서 언젠가 글로 정리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H의 성 안의 미로 안에는 가장 안쪽 공간에 판도라의 방이 있다. 나는 이 부분이 늘 어렵다. 그녀가 만드는 나와의 심리적인 벽은, 마지막 관문에서 늘 나를 좌절시킨다. 판도라의 방 문을 열면 현실이라는 각종 재앙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방을 쳐다보는 것조차 두렵다. 나를 밀어내는 미지의 무언가는 H의 분위기를 더 신비롭게 만든다. 왜 그런 말 있지 않은가? 관심을 받으려면 궁금하게 만들라는 말. 신비주의를 잃지 않는 H의 태도는 나를 더 궁금하게 만들고, 계속해서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이처럼 여러 가지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H의 이지적인 분위기는 그녀를 공주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런 이유로 나는 오늘도 뭔가를 가져다 바치고 싶어 하는 집사가 된다. 그 뭔가에 해당하는 것은 주로 먹을 것이다.
나의 이 마음이 이해가 안 된다면, 고양이를 한번 키워보면 좋겠다. 고양이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밥이나 간식을 주면, 3초 정도 들릴 듯 말 듯한 아주 작은 소리로 관심을 던질 듯 말 듯한다. 이 감질나는 느낌, 그런데 고양이는 무시하기엔 너무나 큰 존재감을 지녔다. 발짓, 몸짓 하나하나가 사랑스럽고 귀엽지 않은가? 그저 존재 자체로 빛이 난다. H가 그러하다.
나는 본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스타일이다. 예전에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나는 오늘날에서야 새로운 내 모습을 발견한다.
내가 집사생활을 꾸준히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다.
H는 공주대접을 대놓고 즐기지 않는다. 매번 부끄러워하고, 항상 고마워해한다. 내가 노력한다는 것을 알아준다. 이 모습은 자꾸만 무언갈 마음 놓고 퍼줄 수 있게 만든다.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다 보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일방적인 관계가 되고, 일방적인 관계는 금방 지치기 십상이다.
사랑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매 순간 인지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이다. 스스로 말하면서, 생각하면서 동시에 자기 객관화가 유지되어야 가능하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기 객관화가 이렇게 잘 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거의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이젠 안다. 내가 잘해줄 수 있는 것은, 내가 원래부터 상대에게 잘해주는 타입이어서가 아니다. 마음 놓고 잘해줄 수 있도록 H가 매번 판을 깔아주기 때문이다.
내가 꾸준히, 그리고 대놓고 퍼줄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상호 존중을 할 수 있는 관계라야 가능하다. 집사와 고양이의 관계가 그렇다. 한쪽으로 흐르는 사랑이지만, 상호 존중 하에 정서적 교류와 상호작용을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퍼준다는 결과만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태도와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라면 가는. 내가 선택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사이가 되는 것은 견딜 수 없다. 내가 선택할 수 있고 원해서 퍼주는 사이이고 싶다. 언젠가 내가 H에게 그런 표현을 한 적이 있다.
“수도꼭지 같은 사랑이라구. 손잡이를 누르면 물이 나오듯이 사랑이 그냥 나오는 거야.”
여기에서 물을 틀듯 사랑이 쏟아지는 수도꼭지에는 사실은 비밀이 하나 숨어있다. 사랑이 쏟아질지 말지는 매번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나는 사랑이 항상 쏟아지도록 수도꼭지를 세팅해 둔다. 나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기대하며 손잡이를 누르는 소녀의 마음을 저버릴 순 없다. 나오지 않았을 때 실망한 표정을 내가 견딜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라고 하면 하기 싫어지고,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그 마음 아는가? 오지 말라면 가고 싶고, 오라고 하면 가기 싫어지는 그 마음 말이다. 이 청개구리 같은 마음도 ‘나에겐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라는 의지의 표현과 같다.
...
어쩌면 H가 아니라 내 쪽이 고양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