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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사회를 미리 경험해 볼 수 있다면

by 여백

내 이야기를 조금 할 수밖에 없겠다.

AI 없이 살아갈 수 없고 AI가 모든 것을 대신해 주는 세상을 막을 수 없다면 미리 마음의 대비를 해두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인간만의 ‘상상력’과 ‘창조력’으로 말이다. 이것을 때로는 성찰이라고 부른다.




나는 지난 몇 년 간 이미 나만의 “로봇이 모든 걸 대신해 주는 상태”를 경험했다. 진짜 그런 로봇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 덕분에(?) 먹고사는 일과 관련된, 또는 생계와 관련된 생산을 하지 않고, 오롯이, 도대체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내 관심사는 예술, 문학, 철학으로 향했다. 여기서부터는 사람마다 다른 결론이 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하는 나’, ‘일하는 나‘가 좋아서 생산으로 돌아간 사람이 있을 것이고, 아니면 ‘소비하는 나’가 좋아서 소비만 하는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모험하는 나’가 좋아서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코로나 시기에 ‘나’라는 사람이 찾은 것은 “나라는 존재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던 것 같다.



창조는 자아를 발견하고, 존재의 이유를 찾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생산을 강요받지 않는 환경에서도 나는 몸을 움직이는 활동(취미발레를 굉장히 열심히 했다)으로 살아있음을 느끼려 했고, 결국 창작과 분석을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 과정은 정말 자연스러웠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경험이야말로 내가 스스로를 “예술을 탐구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나는 인간의 창조가 노동이나 생존의 필요를 초월한 상태에서도 계속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걸 본의 아니게(?) 증명하는 중인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인간은 로봇이나 AI가 모든 것을 대신해 주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창조”와 “탐구”를 통해 살아갈 수밖에 없겠다. 그 이유는, 그게 가장 인간다운 것의 본질이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생산을 넘어, “왜 나는 여기에 있는가? “를 묻고 답하며 살아가는 존재로서 말이다.


그리고 내가 몸을 움직이며 느꼈던 것, 예를 들어 발레에서 발견한 아름다움과 의미는 단순한 활동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창구였던 것 같다. 철학, 문학, 예술을 공부하고 창작했던 순간들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인간은 자문자답하며 본인이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다. 이미 어떤 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스스로를 성찰하면서 “미래의 인간”을 미리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생산과 생존을 넘어선 세계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 나를 이루는 것”을 찾는 분들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중요한 길을 보여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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