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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평

고통 구경하는 사회

by 황인갑

『고통 구경하는 사회』


(김인정 / 웨일북 / 2023)


1. 『고통 구경하는 사회』는 기자 출신 저자가 그동안 취재하고 경험한 일들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 사회과학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고통들에 대하여 우리가 할 일은 구경이나 외면이 아닌, 고통의 공적 애도를 통한 우리 모두가 조금씩 변화하기를 바라는 책입니다. 여러분은 이 책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작품을 읽고 기억에 남는 내용이나 읽은 소감을 나눠주세요. 별점도 좋고 한줄평도 좋습니다. 다양한 의견을 나눠주세요.


고통을 판다. 고통을 본다. 고통은 눈길을 끌고…… 때로는 돈이 된다. 고통이 자주 구경거리가 됐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이제 고통은 콘텐츠가 됐다. 콘텐츠가 된 고통은 디지털 세계 속에서 클릭을 갈망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산업의 틈바구니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버글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통을 착취하거나 구경하고, 모른 척 지나간다.


고통의 포르노 운운하기 전에 인터넷이 불러온 진짜 문제는 우리를 기다리는 죄책감의 총량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자각은 죄책감과 무력감의 원천이 된다. 동시에 사건 바깥에서 비난하는 무고한 위치에 자신을 놓고 정의감에 빠져들거나, 거리감을 핑계로 죄책감으로부터 도망하기도 쉽다. 전에는 언론사들에만 맡겨져 있던 뉴스의 생산과 유통의 몫이 얼마간 이용자에게까지 넘어가며 책무 역시 분산됐다. 사람들을 숱한 플랫폼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반복적으로 노출되고 있다.(p.49)


2. 저자는 무분별하고 과도하게 쏟아지는 뉴스들 속에서 중심을 잃고 흘러 다닐 위험을 경고합니다. 소비자의 눈에 띄기 위한 거칠고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반복적이고 자극적인 영상의 재생을 통해 끊임없이 확대되고 재생산되어 소비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특히, 양극화된 알고리즘을 타고 확증편향 안에서 소비되는 뉴스에 대해 경고하고 염려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러나 범죄자들에게도 신상 공개가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일까. 불쾌하고 불편할 것이다. 가족까지 고초를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실효성이 과연 피해자들의 울분을 달래줄 만큼 클까. 저 사진을 보고 난 뒤 길에서 마주친다면 우리는 그들을 알아볼 수는 있을까. 머그샷도 아닌 흐릿한 중명사진을 바라보는 일이 재범과 범죄 예방에 정말 도움을 줄까. 얼굴이 알려졌으니 그들은 다시 같은 범죄를 저지르기 어려울까. 낙인을 찍는 건 효과적일까. 신상 공개는 피해자들의 돌이킬 수 없는 피해에 제대로 응답하고 있는 걸까.


흉악범의 얼굴이 공개되는 순간 관심은 한 명의 개인에게 쏠린다. 드물게 응집된 사회적 에너지가 이 사람이 누구이고, 어떻게 자라왔고, 어떤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평소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파헤치는 데 소비되어 버린다. 잘생겼으면 잘생겼다고, 못생겼으면 못생겼다고, 키가 크면 키가 크다고, 평범하면 평범하다고 무의미한 평가를 반복한다. 그가 얼마나 뻔뻔하게 반성을 하지 않는지, 파렴치한 말을 뱉어내는지, 소시오패스인지 아닌지 궁금해하는 데 쓰인다. 일그러진 인생과 평범한 얼굴 사이의 간극을 메꾸기 위한 이야기를 찾아다니고, 결국 그에게 드라마틱한 서사를 쥐어주게 된다. (p.69)



3. 흉악범의 신상 공개에 관련해 우리 사회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저자는 디지털 교도소 같은 인터넷 자경단은 또 다른 의미의 폭력이 아닌가 질문합니다. 저자는 개인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 방향을 틀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p.69)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문제는 산업재해라는 고통의 흔함이다.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되어 사회 안에 천연덕스럽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통계는 이 기사 저 기사에 인용되며 산업재해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보여주기도 하지만, 잘 정리된 숫자 속으로 진짜 이야기들을 빨아들여 감춰버리기도 한다. 산업재해가 흔하면 흔할수록 ‘끊이지 않는 산재’ 같은 제목을 단 기사를 계속해서 만들기도 새삼스러워진다.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그 고통을 보는 일에 능숙해지고, 주기적으로 비슷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패러독스에 빠진다.(p.94)


4. 책을 읽으며 ‘흔한 고통’이라는 단어가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지금도 현장에서 매일 발생하는 산업재해라는 침묵의 고통이 사람들에게 보이기에 충분히 처참하지 않으면, 연민을 불러오는 안타까운 사연이 없으면, 감상할 만한 고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뉴스에서 소외되곤 합니다. 산업재해는 대부분 인재라는 점에서 더 안타깝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보도란 ‘누군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속한 것이기에, 취재를 통해 고통에 침범하는 일은 결국 누군가의 삶에 침입하는 일이었다. 어떤 고통이 문제라고 말하는 건, 고통이지만 끝내 당신의 것인 무엇인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이걸 취재하는지 잘 이야기하고 동의를 받은 것만으로는 다 무를 수 없는, 취지가 좋은 것만으로는 다 메울 수 없는, 취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가 있었다.(p.120)


5. 저자는 사람들이 뉴스를 고통의 포르노로 소비하며 자신이 처한 안전한 자리에 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라며 기자로서 저자 자신의 무력감과 죄책감을 고백합니다.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뉴스의 주제로 도마 위에 올라가고 적당한 ‘예시’가 되어 인터뷰를 요구받는 것 역시, 약자가 겪어야 하는 또 다른 고통이 아닌가 반성합니다. 약자의 고통이 사회의 책임이 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와 닮은 것에 대한 연민을 자극하고 발휘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세상에 충분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닮은 것에 대한 반응은 나쁜가? 그게 피와 살과 뼈로 이루어져 무리 생활을 해나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분명히 낫지 않은가? 무엇에서 촉발되었건 불완전한 사회가 대중적 감정이 뿜어내는 힘을 기반으로 무거운 몸을 조금씩 들썩이며 어디론가 가게 된다면 어쨌든 괜찮은 걸까? 약간 비뚤어진 듯하면서도 타인에게 공명하는 감정이기에 이타적인 구석이 있는, 각자와 닮은 것에 한정된 연민을 연료로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재어본다.(p.153)


6. 저자는 홍콩 시위, 우크라이나 전쟁, 텐더로인 마약거리 취재경험 등을 통해 나와 닮지 않은 이들의 고통, 나와 연관되지 않은 일 역시 중요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알고리즘과 구독에 갇힌 나의 타임라인 밖으로 빠져나와 다른 삶의 존재를 알아채라고 이야기합니다.(p.154)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한 공동체가 슬퍼하기로 결정한 죽음을 들여다보면 그 사회가 욕망하는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생각하도록 주어의 영역을 확장해 준다. ‘무엇을 애도하는 사회인가’, ‘이 죽음은 애도할 만한가’라고 질문을 던지고 답변하는 과정은, 적어도 그 사회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정도는 눈치챌 수 있게끔 한다. 기저에 깔려있던 문제에 대한 사회적 불만 위에 죽음과 상실이 하나의 예시로써 얹힌다. 단편적이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충분히 제시하는 그 사례로 인해, 어렴풋했던 문제를 사람들이 이입하고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가 된다.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알게 한다.(p.259)


7. 저자는 사회적 고통과 아픔에 무력감과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중요한 것은 거기서 멈추지 말고, 같은 이름의 다음 고통을 막기 위해 공동체가 함께하기를 누군가의 애도가 우리의 애도가 되기를 결국 우리를 바꿔놓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자가 화두로 던지는 ‘공적 애도’라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모두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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