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돌연한 죽음과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부부는 하릴없이 일상적인 삶을 살아간다. 열대야가 심한
어느 날 저녁거리에서 사라진 아내를 여행사 안에서 발견하고 함께 해외여행을 떠날 준비를 한다. 그들은 헬싱키에서 내려 비행기를 갈아타고 바르샤바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간 뒤 크라쿠프와 프라하를 거쳐 베를린으로 갈 계획이었고 거기서 나올 예정이었다.
작가는 캐리어 바퀴로 이별을, 체코 프라하의 천문시계탑 인형을 통해 삶과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 마침내
돌아오는 길목인 베를린 동물원역에서 아내를 잃어버렸다. 아니, 아내가 사라졌다.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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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첫 문장이다.
“아무도……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그는 좁은 좌석에서 한번 더 몸을 비틀었다.”
부부는 국내여행도 다섯 번이나 여섯 번 정도로 함께 여행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그나마 아이를 잃은 십사 년 전 일이다. 마흔여섯 된 아내와 첫 번째 해외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그는 여행사에서 받아온 팸플릿 외에 수수료를 지불하고 자문을 얻은 후 몇 차례 루트를 수정하여 넉 달 만에 동유럽국가로 여행을 떠났다.
그녀의 여행 가방은 직진으로만 굴러가는 앞바퀴와 방향 전환이 자유로운 뒷바퀴가 달려 있었다. 가방이 자꾸 뒤집어져 그녀는 애를 먹었고 그때마다 그는 멈춰 서서 기다렸다. 그녀는 금세 익숙해졌다.
네 바퀴가 자유롭게 회전하지 않은 캐리어와 자유여행은 예견할 수 있는 이별 여행이었다.
서로를 회피하는 책임의 이중성
“프라하 구시가지로 넘어가는 다리 위에서 그가 그녀를 잃어버렸고 그녀가 그를 내버려 두었다.
도화지에 목탄으로 백합을 그린 그림을 들고. 뭐 하려고. 엽서를 쓰지 애한테. 뭐 하려고. 질문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대신 그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다른 한 번은 그가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초콜릿과 사탕을 파는 거대한 상점에서. 계산대로 이어지는 긴 줄의 시작에 그녀가 있었고 계산을 담당하는 중년 여자가 영수증을 줄까 말 까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아내에게 창피를 주고 있었다. 점원에게 말했다. 유 베터 비 카인드…… 비 카인드……”
누구도 가본 적 없는 ‘죽음’은 찰나일 수도, 긴 순간일 수도 있음을.
“여덟 살 아이는 키가 작았고 손목과 발목이 가늘었다. 웃는 얼굴은 그와 닮았고 찡그린 얼굴은 그녀를 닮았다. 그와 그녀, 그리고 아이. 셋이서 소풍을 간 적도 있었다. 더 한적하고 더 널찍하고 더 안락한 곳을 찾아 계곡 안쪽으로 그들은 들어갔다. 물을 좋아하고 수영을 잘하는 딸이 바위에서 물로 뛰어내렸다.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평영으로 두어 번 팔을 젓더니 엎드린 채로 둥 떴다. 아이의 등과 머리가 물 밖으로 솟아있었다. 등을 움찔거리며 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는 웃었다. 개구리 같다고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지를 그는 나중에 돌이켰다. 찰나였을 수도 있고 그보다는 긴 순간이었을 수도 있다.
아이의 심장이 발작하고 있던 순간. 나는 그 아이를 얼마 동안 내버려 두고 멍청하게 보고 있었는가. 아이의 심장은 너무 깊은 곳에서 멈춰버렸고 그들은 늦었다. 누구도 되살려낼 수 없었다. “
여권이 들어있는 작은 파우치를 그는 왜 아내에게 맡겼을까
여행에 필요한 서류는 여러 장 복사해서 가방 여기저기에 넣었던 그가 귀국을 앞두고 가장 중요한 서류를 자신이 챙기지 않아 이별하게 된 것은 자의인가 타의인가. 우연인가 필연인가.
”베를린 중앙역으로 가는 열차에서 검표원이 여권을 요구했을 때 그들은 작은 가방 하나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권과 항공 예약증과 현금을 조금 넣어둔 납작한 파우치. 호텔에 두고 나온 것 같다고 그녀가 말했다. 열차가 서서히 커브를 돌았다. 괜찮아. 대사관에 가면 돼. 다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그걸 챙기라고 하지 않았어? 그 밖에 내가 뭘 더 부탁한 게 있어? 그거 챙기라고…… 가방에 넣으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거 잊지 말라고…… 그거 잊지 말라고…… 그냥 그거 하나…… 가방에 다 있잖아.
당신 칫솔, 화장품, 사탕 …… 다 있는데 왜 그건 없냐…… 우리 내일 비행기 타야 돼…… 그런데 여권도 영수증도 없어…… 내가 이걸 다 설명해야 해 사람들한테…… 그런데 괜찮을 거라니…… 당신은 괜찮지걱정이 없지 내가 다 하니까…… 당신은 잘 먹고 잘 자고…… 어디서든…… 호텔에서든 비행기에서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어떻게 그렇게 비위가 좋냐 그렇게 멀쩡하게……괜찮을 거라고?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쉬워 모든 게……
그는 문득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서글픈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얼굴.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대신. 그렇게 보지 말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 식으로 보지 마. 사람 빤히 관찰하지 마. 너는 아무 잘못 없는데 내가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
사라짐인가, 잃음인가. 이별의 변곡점
”저물녘에 기차가 베를린 동물원역으로 진입했다. 그는 가방을 끌고 통로를 걸어갔다. 그녀가 그 뒤를 따라갔으나 자주 멈춰 섰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무릎을 꿇고 바퀴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가 무릎을 짚고 일어나 가방을 밀었으나 열차 바닥부의 연결부에 걸려 다시 멈췄다. 그는 되돌아가 그녀의 가방을 잡았다. 낚아채듯 손잡이를 쥐고 들어 올렸다가 앞쪽에 내려놓았다. 가방이 난폭하게 뒤집어졌다가 바로 섰다. 그녀가 넋 놓은 표정으로 그걸 보았다. 그는 가방과 그녀를 내버려 두고 통로를 마저 걸어갔다.
단차가 꽤 높은 계단을 내려가 플랫폼에 가방을 내린 뒤 자신도 내려갔다. 그는 그녀가 아직 열차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가방을 두 번째 계단에 내려놓은 채 멍하니 그를 보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가방을 잡아 플랫폼으로 내렸다. 그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계단에 선 그녀는 기미가 도드라진 얼굴로 다만 그를 보고 있었다. 자동 개폐 장치가 작동되고 별다른 소리도 없이 문이 닫혔다. 그녀의 모습이 창문도 없는 묵직한 문 뒤로 사라졌다. 그는 익스프레스라고 적힌 금속 동체를 멀거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