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진 인생 정영숙
첫사랑
생각만 해도 설렌다. 그때 그 감정 너무나도 그 남학생을 사랑했었다. 반응도 없는 애가 하는 짝사랑 학교가 끝나면 집 사랑채 넘어 저 멀리로 논길 따라가고 있는 그 남학생을 많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10킬로도 넘는 먼 거리에서도 바라보며 해가 저물어가고 있는 들판에서 사라져 가는 그 애틋했던 마음뿐이었다.
한 반이었던 나는 맨 앞자리에 1번 작은 여학생 그 남학생은 키가 훌쩍 큰 오빠 같은 그 남학생은 맨 뒷줄에 책상이었다. 가끔은 장난기로 드나드는 통로 뒤에서 자기 의자를 벽에 기울여서 지나다니는 여학생을 길을 막고 황당하게도 하여서 내 친구 욕쟁이는 눈을 흘리면서 민망한 욕설도 하였다. 그것에 그 남학생들은 쾌감을 느낀 듯했다. 졸업 무렵이 3학년 후반기에 밤에 어느 친구네 마을에서 남. 여학생들이 모여서 손뼉 치며 노래하고 놀았다고.
담임선생님이 불호령 끝에 모두가 운동장에 손을 들고 벌을 다 섰다. 참 착하기도 했던 옛날 어찌 건전한 졸업 놀이였는데 벌을 받아야 했는지 지금 생각하니 억울하다.
3년 동안 한 교실에서 지내던 친구들 헤어지기 섭섭해서 지금 같으면 일종에 쫑파티였는데. 왜 벌을 세웠을까?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그 남학생이 늘 떠올랐다. 그리웠고 졸업 후로 단 한 번도 만날 수가 없었기에 더욱 그리웠나 보다. 우리 동네는 읍면 소재지 중심부였고 그 남학생 동네는 변두리 아주 먼 산동네 산을 몇 개를 넘고 큰 들판을 한없이 넘어야 가는 좀 빈촌인 셈이었다.
시골이라서 약 20리도 더 되었을 것 같다. 그곳을 가끔은 내 단짝 친구가 그 남학생 집 옆에서 살기 때문에 거기까지 가서 자고 오기도 했다. 약속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데 그저 그 집 옆에서라도 가고 싶어서였다. 참 많이도 사랑했던 모양이다. 그 먼 동네를 볼 수도 없는데도 내 친구 집서 자는 것만으로도. 그 남학생을 만난 것처럼 대리만족 같은 감정으로도 만족해했다. 진짜 완전한 짝사랑(첫사랑)이었다. 어쩌면 야속하게도 동창회 한번 열지 않는 반장친구를 원망도 했었다. 마음속으로 만---
그 후 세월은 흘러서 중반이 넘도록 소식조차도 들을 수가 없다. 꿈속에서만 애가 하는. 아주 쪼금씩 그 남학생이 나를 향해 주는 꿈 속에서의 과정은 안타깝기만 했다. 끝내 꿈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고 마는 미완성의 첫사랑은 흰머리처럼 꿈에서도 흐끄므레 하게 사라져 버렸다. 이젠 내 나이 육십육이란 엄청난 숫자 앞에 어느덧 우뚝 서 있는 나의 자화상 지나간 유년시절과 젊은 날들은 나에게 슬픈 상처 투성만 장식된 기분만 남아 있다. 추억으로 환희 환한 추억은 기억이 없다. 부모님의 불화 속에서 고통스러운 악몽 같은 환경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일 게다.
계절로 말하자면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 추운 겨울 너무나도 어둡고 꽁꽁 얼어붙은 동굴 속에서 감금됐던 상처 투성의 추억들 뿐이다. 그런 세월 속에서도 그 남학생의 그림자는 늘 나를 따라다녔다. 중3 때 그리워했던 그리움 달이 밝은 시골밤은 더더욱 그리운 그 남학생 일방적인 편지도 많이 보냈던 것 같다. 내 친구를 통해서 답장은 단 한 번도 못 받은 것 같다. 아마도 그 남학생은 나를 어린애기로 봤을 것 같다. 워낙에 작은 키에 1번을 못 면하고 교복을 벗었으니까. 그런 작은 내 안에 무슨 사랑은 알았던지---
양부모가 계셨어도 사랑받지 못하고 질책과 보호받지 못했던 소외감과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몇 년 전에 그 남학생이 소식이라곤 죽었단 소식, 불확실한 소식 건너 건너 들려온 소식이었다.
아직도 소식을 모른다. 나의 일생 중의 아름다운 추억이라곤 그 첫사랑의 꿈 한 개뿐인 것 같다. 그 후에 얻은 사랑은 모두가 아픔이었다. 지나간 과거를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싶다. 모두가 악몽이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내 나이 육신후반에야 그 무거운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었다. 이제야 나만의 행복이란 세계를 가꾸어 가고 있다. 돌싱이 되어서야 나의 모든 인격체로 돌아온 기분이다. 그 많은 인생살이가 어찌하여서 66년 동안이나 감금된 삶들이 나를 옥죄어 왔던가. 지금도 서럽다.
결혼 혼인의 조건?
행복을 만들어 가기 위한. 제2의 세계다. 배우자가 인성이 좋은 착한 마음씨를 본다. 연애결혼이지만 홀림을 당하여서 스물두 살에 꽃으로 표현하자면 목련에 막 봉오리를 터뜨리려 하는 시점이었다. 순수무구한 그 자체였다. 나는 유난히 유순하고 착한 편이었던 성품 고진하였고 소개도 없이 직장에서 꼬임을 당하여 남편을 만난 계기가 되었다. 인상이 유난히 선하고 착하게 보였고 말솜씨가 대단한 정감을 주었다.
이 세상에서 여자란 나 혼자 뿐인 것처럼 사랑해 줄 것같이 느껴져서 1년간의 연애 끝에 동거도 시작된 결혼생활은 슬픈 고통이 시작되는 남편의 외도. 세월 따라 더 해가는 심각성 한 살 연하도 나이까지 속여서 나를 꼬셨던 남편은 끝없는 이성의 세계를 탐구하듯이 방탕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철없어서 그런가 하고 세월이 가면 철들어서 내 남편이 되겠지? --하는 기다림으로 살아갔다.
개선될 여지도 안보인 데다 두 아이를 지켜주기 위한 희생으로 견디면서 살아갔다.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결혼?이다. 파라다이스로만 꿈꾸어 왔던 결혼은 지옥생활이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남편은 외간여자들만 찾아다니는 하이네와 같은 짐승 같았다.
날마다 첫아이를 등에 업은 채 옥상에서 저 먼 잔등에 택시불이 올라오면 저 차가 오고 있는 남편일가? 하면서 날이 새도록 허무한 불빛만 세다가 아침이 되면 남편은 멋쩍은 웃음.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아침에 집에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저녁은 항상 자정 무렵에 남편이 귀가해서 내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별별 사건들이 많았다. 많은 여자들이 내게 남겨준 악몽들 항상 쫓겨날까 봐서 무서웠던 세월이었다. 아들이 고등학생이(둘째)돼서야 이제는 쫓아내진 않겠단 믿음이 생겼다. 그래도 나이가 들수록 남편은 성중독자임을 책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고쳐보겠다고 무던히 헛수고를 많이 했던 나의 어리석음. 이미 내 나이 52살에야 판단이 섰다. “재생불량”남편은 변할 수가 없는 폐품과 같은 존재란 것을 알아차리고 심한 우울증은 안고 집을 (남편) 떠나기로 결심하여 서울로 미련 없이 보따리를 쌌다. 그동안 생활비도 모았겠다 더 이상은 상한 맘으로 옆에서 생생히 생중계되고 있는 외도를 보고 견딜 수가 없었다.
간접적으로 쫓겨난 나는 서울생활이 시작되면서 오히려 행복감과 평안이 시작되어 갔다. 공간의 자유함과 행동의 자유함. 죽을 것만 같았던 억압과 고통이 쪼금은 희석이 되는 생활이 신앙생활에 의지하게 되었다. 해외선교도 매년 가면서 좋아한 여행을 겸하게 되어서 너무나도 좋았다. 여행을 겸하게 되어서 너무나도 좋았다. 날개가 돋친 듯이 자유로운 정서적 회복이 되어갔다. 때로는 슬프고 비참한 내 초라한 모습을 보면서도. 공황장애. 우울증 엄청난 압박으로 짓눌렸다.
홀홀 단신 객지에서 이겨내야만 했다. 자그마치 십 년이란 고난의 광야를 살았다. 그런 어느 날 남편이 폐암 말기란 소식에 통곡이 쏟아졌고 한편은 기쁨이었다. 이제야 내 차지가 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그것도 나의 허상이 돼버린 채 남편은 나를 찾지도 않고 그런 짓만 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또 절망 죽어가는 시점에서도 나를 찾지 않는 야속한 남편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즐거운 외도를 즐기면서 암투병을 2년을 했다. (남편) 교회는 나가면서도 하나의 전시용이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포장지 일뿐이었다.
마지막 죽기 한 달 전에 미움도 원망도 사라지고 간병을 해야겠다는 간절함 때문에 아침에 집을 가서 해가 지도록 울며 불며 살아온 서러운 날들을 앨범처럼 이야기하면서 나의 간병을 허락해 달라고 애원을 한 끝에 3일 후에 서울에서 준비하여 들어와서 전심을 다하여서 간병을 했다. 살기 위한 생존본능과 애착은(남편) 대단했다. 남편은 식도가 막혀서 미움도 재채기로 거부해도 끝까지 한 대접씩을 다 비웠다. 참 애처롭기까지 했다. 원도 한도 없이 즐기고 돈 쓰고 살았어도 무슨 생애 미련이 저리도 많은지 하고 측은했다. 딸에게까지 자기의 불륜이 드러난 일로 폭행을 가했던 상처를 딸에게 용서도 끝내 구하지 않고 버티다 홀연히 가버렸다.
그런 딸은 독신을 고집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결혼하여 충실히 잘 살아주고 있다. 그런 치유받지 못한 딸의 상처는 혼자 지내는 노년의 어미를 소외시킬 정도로 엉뚱한 반항을 이 어미한테 하고 있다. 딸의 외면 때문에 난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슬플 때가 있다. 주기적으로 허탈한 슬픔과 무관심이란 고독감에 죽음을 충동당한다. 어렵게 신앙의 힘으로 다시금 살아나긴 한다. 일상 대화조차 나눌 대상이 없다는 현실이 나는 이겨내기가 참 힘겹다. 지구상에 혼자 남은 것처럼 쓸쓸하기만 하는 나의 노년 세상의 미련이라곤 머리끝만치도 없는 낙이 없는 남은 삶이 재앙으로만 여겨진다.
초등시절 초등학교?
그리운 엄마
하얀 리본 고무신이 좀 있는 집 아이들이 신었다. 가난한 친구들은 새까만 고무신(반구두란 것을) 신은 시절이었다. 학교점심도 옥수수 죽은 가난한 친구들만 먹는 급식이었지만 도시락을 싸간 나는 그 죽이 너무나도 먹고 싶어서 밥하고 바꿔 먹었던 기억이 난다. 참 꿀맛이었다. 지금처럼 먹거리(간식)가 귀한 때여서 그랬던 것 같다. 돈도 농촌에서 구경하기가 어려워서 닭이 낳아준 달걀 한 개 어렵게 집에서 훔쳐다가 과자를 꿈에 덕 보기로 사 먹었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드래도 지금은 그리워진다.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지금은 흔하디 흔한 과일도 그때는 1년에 두 번 명절에 간신히 맛만 볼 정도였다. 그것도 좀 부잣집인 집에서만 가능한 일. 내가 어린 시절은 우리나라가 무척 가난했다. 보리밥만 먹어야 했고 쌀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만 드실 수 있었다. 쌀밥이 어쩌다 한술 남으면 얼마나 꿀맛이었던지 지금의 치킨 보다 더 맛있었다. 겨울이면 앞마당에 눈도 많이 쌓여서 눈 치우기가 싫었던 추웠던 그 겨울 좋은 것은 홍시처럼 달고 맛있는 고구마를 겨우내 먹을 수 있었던 즐거움이 있었다.
그때 그 추억 때문인지 난 지금도 겨울 고구마를 무척이나 즐겨 먹는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유난히도 옷을 좋아했다. 잘 때는 예쁘게 잘 접어서 머리 맞대두고 잤다고 한다. 지금도 옷을 무척 좋아하고 구색 맞추기를 센스 있게 하는 것 같다. 초등 때 뜨개질도 관심이 깊어서 대나무를 깎아서 엉터리 대바늘대를 만들어서 헌 옷 실을 모아 동전 주머니를 색동처럼 짰던 추억이 살아난다. 지금 초등 입학 전 5-6세였던 기억도 난다.
유달초등학교 앞에서 살 때였다. 학교 운동장 조회를 아침이면 구경했던 기억 친구들과 학교가 쉬는 날이었던 날은 교실까지 침범하여서 자연학습 채집 같은 것들을 훔쳐왔던 호기심들이며 참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유달국민학교가 전소했던 큰 불구경이며 어둠을 붉은 불덩이가 되어 갔던 불 무서운 줄도 모른 채 단순히 구경만 했던 것 같다. 일곱 살이 되면서도 슬픈 이별 부모를 떠나서 할머니 할아버지 집으로(섬) 이유도 모른 채 언니와 둘만이 6남매 중에 떨어져서 살게 됐다. 그땐 슬픈 줄도 모르고 그냥 그랬던 것 같다. 어쩌다 한 번씩 부모가 있는 목포를 오긴 했으나 머문 날은 길지 않았던 것 같다. 배를 타고 가야 한 날은 몹시도 싫었던 기억뿐이다.
머리에서 검은 이는 우수수 모래처럼 쏟아졌던 그날들 위생이 엉망이었던가 보다 시대가 그러했다. 목욕탕은 가면 그 뜨거운 탕 속에 안 들어간다고 엄마가 욕하며 꼬집어 뜯었던 아픔의 기억도 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없는 역기능 가정에서 나이가 들수록 고통스러운 환경이 어린 나를 그때부터 불면증이 40여 년간 고문을 했었다.
상처받기 위해서 태어난 생명처럼 부모님의 불화는 1년 내내였다. 그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동네 앞 저수지에 빠져 죽을까도 생각했었다. 국민학생이었던 내가 그토록 아버지의 폭언과 공포감이 무서웠다. 견디길 중졸 때 까지였다. 졸업 후 돈 벌기 위해서 목포로 독립하게 되면서 자취생활과 회사생활을 하게 되면서 독립만세를 부를 만큼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다. 월급을 받아서 좋아한 옷을 마음껏 사 입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 행복도 그리 길지는 않았던 것 같다. 폭군인 아버지의 출현으로 어이없는 사건이 생겨서 회사에서 끌려 나오게 되고 얼마나 두들겨 맞으면서 끌려가게 됐다. 지울 수 없는 수치감 얼굴을 택시 안에서 얼마나 주먹으로 맞았는지 다음날 얼굴은 호박만큼이나 부어서 사람얼굴이 아니었다. 이유는 우리 엄마가 계신 대로 작은엄마 집으로 합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알코올중독자도 아닌 아닌 아버지는 이상한 정신 질환자였던 것 같다.
온 식구를 돌아가신 그날까지(79세) 전쟁터로 공포에 떠는 날들이었다. 소리 지르고 욕하고 몽둥이로 얼마를 때리고 우리들도 거스르면 똥을 뻘뻘 싸도록 몰매를 맞으면서 그 전쟁 속에서 견디며 살아왔었다. 그런 산물로 우리 육 남매는 모두가 병든 자존감에 형편없는 열등감이 짓눌린 병든 삶을 살게 돼 버렸다. 지옥 같은 유년시절까지 겪은 후에는 직장을 찾아서 그곳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었다. 결혼 후까지도 악몽에서 시달려야 했다.
빨라진 나의 결혼도 그 이유였다. 도피처로서 결혼은 천국인 줄 알았다. 젊은 꿈을 가져보지도 못한 채 유년시절은 부모 때문에 짓밟혔고 결혼해서는 괴수 같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 40년을 눈물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얼음 위에서 살아와 버렸다. 아니 살아온 게 아니고 세월에 떠 밀려왔다고 하는 것이 더 확실할 것 같다.
서른
여덟에 자궁경부암이란 엄청난 경고로 투병 10년을 그저 담담하게 이겨냈다. 좋아한 버섯 한뿌리도 못 먹고도 세끼 밥 잘 먹는 것으로 질긴 나의 생명은 다시 꿋꿋이 살아나고 말았다. 죽음의 기회는 두 번 시험하듯이 그냥 지나가고 말았다. 죽기를 원하고 기도했지만도 하나님은 나에게 남은 숙제를 하고 오라고 데려가질 않았다. 유감스러웠다. 살아난 것이---
지금도 백세시대라고들 좋아하지만 나에게는 재앙이라고 생각한다. 옛날부터 나의 수명 나이는 칠십이다. 희망사항 일뿐일지 모르지만 난 젊고 멀쩡할 때 가고 싶다.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은 너무나 싫다. 예수님처럼 살고 싶다.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온유함과 모두를 다 받아들일 수 있는 포근한 사람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내밀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러나 상처투성으로 뭉쳐진 나는 그러기엔 너무나도 작은 그릇이다. 모두 다 품어줄 수 있는 그런 넓은 가슴이 못된다. 부족하기에 더 열심히 배우려고 한다. 죽는 그날까지 많이 듣고 많이 보고 많이 배우고 싶다. 인류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의인이면서 그 십자가에서 모든 피 다 쏟으시고 대속하신 예수님을 닮은 사랑을 배우고 싶다.
-유년시절-
나는 지극히 내성적인 성품을 가졌다. 거기다 감수성은 예민한 우울질이란 기질을 가졌다. 소심하기도 하고 섬세하고 또한 어느 부분은 낙천적이기도 하다. 나의 어린 시절은 왠지 슬픈 기억뿐이다. 역기능 가정에서 너무나도 공포스러운 환경에 인질 된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히스테리라 심각한 아버지 괴팍한 성품으로 우리 가족은 날마다 인질로 공포스러운 폭언과 매를 맞으며 성장해 왔다.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공포감이었다.
그때그때 꿈은 어서 커서 결혼이란 도피처를 꿈꾸어 갔다. 도중에 자살까지도 생각할 끔찍한 환경은 전쟁터였다. 중학교를 마치고 도시로 탈출하듯 자취생활에 자유를 얻게 되었고 사회생활이란 직장생활도 어려운 가운데 하게 되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민온 기분이었다.
돈 벌어 독립생활 하면서 좋아한 옷도 사 입을 수가 있었고 조금은 행복이란 맛을 보게 되었다. 양부모 사랑은 메마른 상태에서 마음에 항상 외로움을 느꼈다. 자유함의 외로움 속에서 청소년 시절까지 맞이하게 됐다. 이제 사랑을 꿈꾸는 가장 본능적인 감정으로 싹이 트기 시작한 22살 꽃봉오리로
20-30대 이야기
집을 떠나 자취생활이 시작되었다.(도시로 진출) 직장을 구했고 처음 월급을 받는 수입이 생겼다. 좋아한 옷을 마음껏 살 수 있어서 행복했고 괴팍한 아버지로부터 독립돼서 좋았다. 그런 독립생활에서 연애도 시작됐다. 끝없는 파라다시의 꿈을 키우는 연애였다. 그 시절 우리의 문화는 한참 막걸릿집 문화였다. 술집에선 장현 가수등 노래가 항상 흘러나와 우리의 감성을 유혹하기도 했던 그때의 감정이 생생히 떠오른다. 서툰 술맛에 낮부터 취해서 땅이 빙빙 돌아서 친구들과 침침한 부엌방내 자취방으로 가서 한숨 자고 술에서 깼던 일이며 사춘기였든지 방황하는 친구 셋이서 여수까지 짐가방을 들고서 가출했다.
마음씨 착한 젊은 아저씨가 목포까지 각자 되돌려 주고 가셨던 그분을 찾고 싶다. 이름도 성도 기억이 안 난다. 참 아쉽다. 그 후 곧 결혼한 이유로 그런 기억은 흔적도 없이 다 지워버렸다. 유난히 질투가 심한 남편이 무서워서였다.
살면서 내내 나이 들면서 더 생각이 난다. 23세에 첫딸을 낳고 산후조리 중에 부어있는 나를 그분이 2년 만에(하동분) 여수에서 찾아왔었다. 아마도 나의 느낌과 추측이지만 내내 나를 못 잊고 떠올라서 결혼상대로 찾아왔었던 같아서 더 마음 한구석이 짠한 여운이 남았다. 차 한잔도 못 나누고 돌아갈 때 그분의 허탈감은 어떠했을지----나이 어린 나였기에 결혼했으리란 상상도 못 하고 왔을 텐데---
나처럼 지금도 그분도 지금 나를 떠올려볼까? 이름만 안다면 찾아보고 싶은 내 인생의 단 한 사람이다. 너무나도 고마운 분이었기에--- (남편) 심각한 외도로 나의 일생 40년을 좀 먹었기 때문에 그분이 더욱 생각난 지도 모른다. 이루어지지 못한 스쳐 지나간 사랑이었기 때문일까? 인연의 기회가 지나간 후에야 명상은 사랑이라고 할까 지금 생각해도 참 그립다.
일생에 가장 아름다운 만남의 추억 같다. 그런 세월에 떠 밀리듯이 정신적 고통에서 살아가면서 38세 암이란 큰 장애물을 만나기도 했다. 힘든 정신적인 결혼 광야생활이 지긋지긋해서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했던 소원 기도는 이길로 죽음을 소원하는 기도였다. 마취에서 안 깨어나길 기도했었다. 그러나 긴 시간 끝에 다시 살아나고 말았다. 퇴원이 가까울수록 집이 도살장처럼 들어가기가 싫었다. 슬펐다. 다시 돌아가서 견뎌내야 할 외로운 투쟁 때문에 회복의 여정은 보이질 않았던 결혼 생활이었기에 아니 완전히 감금생활이었다. 나의 생활 전부를 속박당한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다행히 여행만큼은 포기하지 않고 해외로 많이 갈 수가 있었다.
그도 슬픈 여행이었지만 현실도피를 위한 일시적인 수단이었기에 지금 생각하면 아주 선택은 잘했다고 생각한다. 나의 일생 중에 여행이라는 아름다운 추억거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외로울 때 울적할 때 여행추억을 껴내 본다. 찌든 생활가운데 활력소가 되어준다. 서른 중반에 둘째인 아들을 낳고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그때가 5.18 사태가 난리가 난 5월이 아들이 돌이었다. 시내가 난리가 난 상황에서 돌잔치를 망설이다가 기어이 잔치를 집에서 준비하여지렀다. 그 많은 음식을 항상 나는 혼자 해냈다. 음식 하는 것이 자신이 있었던 탓에 잘 해냈다. 아들을 낳아서 이혼을 안 했단 말까지 남편은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 병든 남자에게 나는 일생을 의지하며 행복을 꿈꾸어 왔었다. 결혼생활 40년이 지나가도 끝나지 않는 풍랑은 남편의 죽음이란 막이 내리고서야 끝이 난 것이다.
나의 20대는 불행한 장막으로 일생이란 운명의 무대로 진행되어 버렸던 것이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그때가 참 아름다운 세상이었던 같다. 겨울엔 눈도 많이 와서 동화 속에 마을이 됐고 마당에 모아둔 눈더미 속에 생고구마 묻었다가 생으로 먹었던 행복한 그 시절 할아버지가 때때로 통돼지 잡아서 삶아 영양식을 시켜주었던 추억 큰방에 모인 삼대가 머슴이 도마 놓고 썰어준 몽글몽글 김 올라온 고깃 접을 모여 앉아서 시끌벅적 먹었던 행복함 그때가 그립다.
한 이불속에서 홍시처럼 밤에 굼불로 삶아 놓은 물고구마 바구니를 잡아당겨서 이불속에서 엎드러져 먹었던 추억이며, 그때가 정말 그립다. 낮에는 양지바른 사랑채 마루에서 서툰 뜨개질로 동전 주머니 짠다고 즐거워했던 초등시절 나는 그때부터 뜨개질이며 손을 꾸미는 것을(음식포함) 무척 지금까지도 좋아한다. 달밤이면 가을 이맘때 친구들과 모이면 무서워 도망치던 공포감은 지금도 오싹하다 옛날 그때가 좋았다. 그리운 친구들---
도시에서 부모를 떠나 할머니 시골집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봉건적인 사상으로 손자와 손녀 간의 차별이 심하셨다. 그런 여건 속에서 사촌 오빠 두 명과 살았다. 오빠를 따라서 들로 논두렁으로 다니면서 개구리 잡아서 돌로 허리를 잔인하게도 잘라내고 껍질을 벗겨서 닭고 같은 하얀 살만 풀줄기에 연속 끼워서 잡았다. 집에 와 아궁이에 구워 먹으면 최고의 고기맛 구경하기가 귀했던 그 옛날. 저수지에서 자잘한 새끼 붕어들을 잡아온 오빠들은 된장 초장에 국물처럼 생 화판을 만들어서 수저로 떠먹었던 그 꿀맛. 또 밤에 처마밑에 참새잡이에 즐거웠고 오빠들과 줄줄이 화장실이라고 해야 불을 때고 남은 검은 재 치간이란 곳에서 똥 싸며 불장난으로 새끼발가락 위에 달모양처럼 화상 입은 흉터가 남아있다. 참 짓궂은 오빠들과의 유년시절이었다. 높은 벽장에 할아버지만 드시던 꿀단지를 함께 훔쳐 먹었던 추억이며
어린 시절 우리 엄마는 몸집이 좋으신 풍채로 기억한다. 너무나 차가운 엄마 애정이 없는 비판과 미워하는 소리만 하는 엄마 부부불화로 인한 결과물이었다. 내가 초등 시절에 무엇을 잘못했던지 모른다. 저녁밥을 굶겨서 너무나도 배가 고프고 잠이 안 왔던 슬픈 기억 납부금을 제때에 절대로 안 주고 교실에서 손들고 벌 받게 했던 수치감 모든 자식에게 욕으로 날마다 당신의 한풀이를 하셨던 엄마 불쌍한 여자의 삶이었다.
아버지로부터 그 멸시와 학대 속에서 견디어 살아오신 불행한 여자의 일생이었다. 다행히도 공평하신 하나님은 아버지보다 5년을 더 살도록 보너스 인생 휴가를 허락하셔서 우리네 딸과 국내여행도 누리시며 노년을 잘 지내시다가 가셨다.(95세에) 세월이 갈수록 그런 메마른 얼마도 엄마이기에 매년 어버이날이면 눈물나레 생각난다. 효도하지 못했던 죄책감도 아쉽다.
-청년기부터 결혼까지- (일생에 고마운 분)
지금까지 살아온 중 가장 고마운 분이 생각난다. 20대 초반에 어떤 슬픔으로 인한 가출(자취 생활 중) 친구 셋이서 여수로 옷가방을 싸들고 집 나갔던 추억 그곳에서 카페에서 손님으로 만났던 그분이 찾아보고 싶다. 얼굴은 거므스레 한 넓적한 네모형에 키는 좀 자그마하고 약간은 뚱뚱한 형이었고 나이는 꽤 들어 보이는 아마 30-40 정도였는지 손목에 시계가 보니 좀 비싸보였다. 내 짐작이지만 여수에서 아마도 밀수를 하는 분 같은 느낌이 들었다.(경상도 말씨에)
그 남자는 우리들(친구 둘)을 막냇동생들로 보아준 것 같다. 하동분인 것으로 기억한다.(여수여관에다 셋을 하룻밤을 재워서) 우리를 달래서 고향 목포에다 내려다 주고 가셨다. 나쁜 마음을 전혀 먹지 않고 철없는 동생들로 여기신 것 같다. 생면부지인 우리 가시네들 셋을 자비 들고 시간 들여서 집 집이 가족에게 전화해서 인계하고 가셨던 그때 그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새록새록 기억에서 살아난다.
꼭 만나고 싶다. 이름도 성도 기억이 없다. 더구나 그 후 1년 뒤에인지 나를 소식도 없이 목포까지 찾아왔었다. 내가 이미 결혼하여 첫 아이를 (딸)을 낳고(몸) 한옥 큰방 한 칸짜리 세 살고 있을 때였다. 산후조리 중에 뚱뚱 부은 얼굴로 있을 때였다. 내 옷차림은 그 당시 유행했던 월남치마라는 긴치마를 입고 머린 긴 단발 생머리였다. 대문밖에 손님이 나를 찾는다고 기와집주인 할머니 권사님이 말하셨다. 나가보니 고마운 분 여수에서 만났던 그 남자였다. 황당하고 반갑고 했지만 한 발도 문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산후조리 중 상황이었다.
문밖에서 몇 마디뿐 집안으로 모시지도 물 한 그릇 대접도 못한 채 보내야만 했던 아쉬움, 그때 질투가 심한 남편이 알면 난 바로 쫓겨날 상황이었다. 더구나 그 남자의 표정에서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또 다른 새로운 감정에 못 이겨 기대를 안고 오셨던 느낌이었다. 내 나이 스물두 살이었기에 벌써 결혼은 생각지도 못하고 멋진 데이트를 생각하고 온 것 같았다. 궁경 시켜 주라고 목포에 왔다는 그 한마디였다.(과묵형이었다) 아마도 가서도 산후조리에 좋은 한약종류를 보내주셨던 것 같다. 참 마음이 쓸쓸했다.
내 추측이지만 결혼까지도 생각을 하고 오신 느낌이었다. 그때 나이에 나는 꽤 순진하고 순수한 모습이었다. 얼굴도 예쁜 편이었나 보다. 나는 자존감이 제로였기에 지금도 예쁘다는 인정이 안된다. 스물두 살 나이를 생각하니 참 예뻤을 것 같다. 얼마나 풋풋한 사과처럼 해맑았겠는가---
진갑이 넘은 지금 생각하면 그 나이는 예뻤을 것이;다. 그렇게도 허망하게 그 남자를 보내고 일상에 묻혀서 살아갔다. 그런 나의 젊은 결혼 생활은 연애 때부터 심한 바람기는 첫 만남부터 나를 고통스러운 슬픔으로 시작되어 가고 있었다. 잘못된 만남 날마다 날을 세고 들어오는 남편 밤이 새도록 첫딸을 백일도 안된 애를 들에 엎고 대문 위에 한평 정도 된 옥상 위에서 저 먼 잔등에 올라오는 택시불빛을 세며 저차로 오나 하는 기다림으로 살아온 세월은 야속하게도 하루같이 40년을 반복된 슬픔으로 다 보내 버렸다.
그런 고통과 싸우며 여수남자를 더 생각나게 했다. 그 남자가 1년만 먼저 찾아왔어도 나의 운명은 훨씬 행복한 결혼 생활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도 여운을 남기고 있다. 비켜 가버린 인연은 일생을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 아쉬움---
영원히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제로이다. 그 남자도 이루지 못한 나를 나처럼 지금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살아는 있는지 나이가 나보다 많아서 병들어 죽었을지도---그리움과 아쉬움만 남아있는 추억 아름다운 한 장면의 영화 같은 나의 삶 가운데 최고로 아름답고 고마운 추억의 얼굴이 지금 더더욱 그리워진다. 싱글이 된 나의 공허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니 난 일생을 남편이 있어도 남편이 없는 성경인물과 같은 사마리아 여인이었다.
결혼 40년을 심각한 외도만 하다가 병들어서 떠나버린 남편은 나에게 나그네였을 뿐이다. 미워지지 않는 나 혼자의 외짝 사랑으로 남편을 기다리며 인내하며 살아왔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이 땅을 홀연히 육십 초반에 가버렸다. 평소에 시기심 많은 남편은 저 세상도 좋은 자리 먼저 차지하려고 나 먼저 갔나 싶은 생각까지 든다. 그리도 신나게 돈 쓰고 신나게 연애하고 명예 얻고 다 누리고서 바쁘게 떠나간 남편 지금도 용서가 안되고 있다. 너무도 슬픈 결혼생활이었기에---
돌싱이 되어 버린 아직은 내 나이가 꽃으로 표현하자면 목련꽃으로 나를 표현하고 싶은 나이다. 주위에서 나를 아끼는 어르신들은 시집가라고 한다. 아깝다고(ㅎㅎㅎ) 난 너무도 지겨운 소리다. 그 고통을 나더러 다시 시작하라는 소리로 들린다. 그래서 여수에서 찾아온 그 남자가 더욱 떠오른다. 정말 만나 보고 싶다.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 남자가 건강하고 행복이 가득한 노년을 살고 있으면 좋겠다. 만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을지라도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길 간절히 바란다. 일생일대 가장 아름다운 그 추억을 먹으면서 남은 노후들 완성해 가는 수채화처럼 내 안에 그려갈까 한다. 이 글을 쓰는 이 시간 목이 메어지며 눈물이 차오른다. 모든 것이 허무하고 황혼의 내 모습이 초라한 돌싱으로 남아서일까?---
열심히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교회로 도서관으로 쫓아다니고 산다. 내 안에 비어있는 구석구석을 채우고 싶어서인지 혼자 있는 커다란 공간이 무서워서 인지 나는 오늘도 분주히 시간을 채워가고 있다. 나만의 아주 작은 보람을 누리면서 그 어떤 것보다 건강을 주심에 감사한다. 오늘도 두 발로 이만보를 걷기 위해서 기쁜 맘으로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