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제 상태는 대체 뭘까요?
명절을 맞아 성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명절에 어르신들께 들어봤을 만한 결혼에 관한 주제를 가져와봤다.
한국에는 명절에 친인척이 모이면 결혼 적령기(이거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가임기라고 봐야 하나)의 성인들을 상대로 결혼 여부 혹은 자녀 유무를 가지고 스트레스를 주고받는 관례가 있는데, 이때 자신의 정체성 혹은 상태를 밝혀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독자로 염두에 두고 써본다.
뭐, 기혼은 모두가 알다시피 결혼을 한 '상태'를 뜻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게 또 굳이 사전을 찾아보니 약간 애매한 부분이 있다.
이 사전적 정의가 묘하게 좀 거슬린단 말이야. '결혼한 상태', '결혼함' 이 아니라 '이미'라는 단어가 붙는 이 부분 말이다. '이미'의 의미는 '일정한 시간보다 앞서' 혹은 부사로 다 끝나거나 지난 일을 이를 때 쓰는 말로 '벌써', '앞서'의 뜻을 나타낸다.
'일정한 시간보다 앞서 결혼함'이라고 하면 조혼이나 어.. 흔히 말하는 혼전임신(나는 사실 이 단어도 마음에 안 든다만) 같은걸 떠올리게 하고, 부사로 다 끝나거나 지난 일을 이를 때 쓰는 말이라고 하자면 '벌써 결혼함'이 되니까 이도 좀 이상하다. 나는 이 기혼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혼인에 대한 '상태'로만 봤는데, 여기에는 일정한 시간이나 때가 정해져 있는 모양이다. 기혼의 사전적 의미는, 결혼에는 사회적으로 합의한 적합한 때가 따로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건 기혼과는 다르게 이런저런 관련 단어들이 막 튀어나온다.
'아직' 이란 말의 뜻은 때가 되지 못하였거나 미처 이르지 못하였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아직이 붙어버리면 미처 결혼을 하지 못한 상태가 곧 미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아직'에서 볼 수 있는 '못함'이라는 것은 의지부정이 아니라 능력부정에 쓰이는 말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했다가 이혼한 경우엔 뭐가 되는 거지? 이미 결혼한 사람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지만 결혼상태를 유지는 안 했잖아, 이 경우면 사전적 의미로는 기혼인가? 근데 이혼하고 나서 스스로를 기혼이라고 하거나 미혼이라고 하거나 욕먹을 가능성이 높은데)
어쩌다 포털 연예란에서 슬쩍 마주친 이런 훈훈한 미담에도 어쩐지 기분 좋게 손뼉 치기가 어려운 것이다. 다른 말은 없을까, 혼자라는 뜻의 싱글에다가 엄마의 뜻인 맘을 가져다 붙인 싱글맘이 차라리 나은 것 같은데.
남보라 배우님이 하고 계신 일은 매우 의미 있고 좋은 의도의 좋은 일이지만, 이 미혼모라는 단어를 이용해 쓰이는 기사들은 뭐랄까 '미혼'인데 아이를 가져 엄마가 되면 당연히 자립을 못하고 힘들고 두려워하는 약자로서의 여성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미혼모'는 과연 모두가 약자일까? 아마도 이 후원이 필요한 '미혼모'들은 비자발적 출산이나 비계획적 출산으로 인해 준비를 채 하지 못한 채 엄마가 된 경우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는 선택했지만 결혼은 선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면 모두가 그런 약자일 거라고 전제를 깔아버리지 말고 '비혼모'일 가능성도 좀 염두에 두면 좋을 텐데.
그래서 미혼모 그리고 미혼부라는 단어 자체가 나는 어딘가 조금 껄끄럽다. 사회는 이들을 결혼을 '못한'사람들로 본다는 것을 사전적 정의를 검색하고 기사를 찾아보다 새삼 깨닫고 이 불편함이 어디서 오는지 재확인한다.
아... 얼마 전에 이력서 양식에서도 미혼/기혼 체크란을 마주했는데, 나는 그 이력서를 채워 넣지 않았지만 아마 채워 넣어야만 하는 상황이 와도 "저는 미혼도 기혼도 아닌데 어떡해요?" 하고 물었을지 모른다.
대체 왜 미혼 아니면 기혼인 거야? 그거 말고는 정말 없어?
자, 이제 여기서 비교적 최근에 나온 개념인 '비혼'이 등장한다.
아, 이것이야말로 결혼 여부를 상태로만 판단하는 말이구나(적절한 때보다 이르다거나, 하고 싶었는데 못했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역시 현대적인 말이야!라고 생각했다. 결혼이 이 단어에서는 개인의 선택에 달린 것이라는 그 느낌.
하지만 또 막상 현실을 생각해보면 내가 누군가에게 나의 결혼상태 여부를 "비혼입니다"라고 하면 오해를 사기 좋은 것이, '비혼'이라고 하면 영원히 결혼을 안 할 것을 선택한 사람인 것처럼 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비혼은 그냥 나의 지금의 상태인데 언급하는 순간 비혼주의자가 되어버리면 곤란하다. (결혼에 딱히 정해진 신념을 꼭 가져야 하는지도 모르겠는 마당에) 결혼을 약속한 사람들이 결혼식을 열듯이 비혼을 결심한 사람들은 비혼식이라는 것도 연다는 데 나는 딱히 아무 결심도 없는 상태란 말이야. 비혼식을 했다가 맘이 바뀌면 이혼도 아니고 뭘 해야 해?
하고 매번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단어는 무엇일까.
아니 그보다 나이가 들 수록 이런 장황한 설명이 필요할법한 상황의 빈도가 높아진다는 것이 문제다. 내가 나의 상태에 맞는 단어를 찾아내거나 만들어내지 않아도, 굳이 설명 안 해도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연인 사이로 발전하기 위해 고백을 할 때 라거나) 혼인신고의 제도적 장단점을 알아볼 관공서나 은행 외에서는 묻지 않는 것이 당연한 사회는(이라고 말하고 명절은 이라고 읽는다) 언제 오는 것인가.
아, 번외 편으로 사실혼도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사전적 의미를 읽어봤지만 어딘가 아리송해서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나와 같은 상태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새 단어가 생기는 그날까지, 아니면 사회가 나의 결혼 여부에 관심을 끊는 그 날까지 우리 존재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