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전자에서 퇴사를 하고 나면 더 멋진 미래가 펼쳐질 줄 알았다. 공순이라는 이름표를 떼고 나면 더 멋지고 눈부신 이름표를 달 줄 알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엄마가 아파서 병간호한다는 이유로 그만두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기력해지고 피폐해지는 것만 같았다.
일단 내가 살아야 했다. 여기저기 일자리를 수소문했고초등학교 동창의 제안으로 S전자하청회사로 입사를 하게 됐다. 일을 그만둔 지 한 달 만에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입사와 함께 회사 내에 있는 기숙사로 들어갔다.돈을 벌며 아끼기에 최고의 조건이었다.
S전자 출신이라는 이력을 높게 사주 셔서인지, 내 능력을 높게 봐주신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라인(컨베이어벨트에 앉아서 하는 일)에서 일하던 사원에서 관리자로 금세 자리를 잡았다.
제일 처음엔 출고를 담당했다. 완성된 제품을 스크레치가 안 나게 잘 포장하고 카운터 해서 기입하고 S전자로 출하할 수 있게 하는 일이었다. 출고시간을 맞춰야 할 때는 라인에 투입되어 일을 거들기도 했다.
라인에 앉아서 일을 할 때는 내 일에 집중할 때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야간근무 때는 잠을 쫓기 위해 많은 대화를 주고받기도 한다.
이것이 야간근무만의 묘미이기도 했고, 이 시간을 통해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다.
중국 교포도 있었고, 좋은 언니, 오빠들이 많아서 의지도 되고 일하는 게 재미도 있었다.
20대여서 그런지, 타고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박스 2개쯤은 거뜬히 들고 날랐다.
그런 모습을 상사분들께서는 참 이뻐해 주셨다.
출하실로 들고 가도 납품기사님들이 신기하게 나를 바라보셨고, 역시나 이뻐해 주셨다.
그러고 보니 나는 참으로 이쁨을 많이 받았고, 그래서인지 더욱 몸을 사리지 않고 일을 해왔던 것 같다.
일을 하다가 짬이 나거나 한숨 돌리고 싶을 때면 납품기사님들께종종 찾아가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또 다른 인생도 엿보고 나누며 배울 수 있었다. 내 인생의 어느 정도는 그곳에서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정말 다양한 사람들과 만났고 교류했다. 군대 가기 전 알바로 왔던 신랑도 이곳에서 만났던 건 안 비밀이다.
점점 출하량이 늘어났다.
여자의 몸으로(나는 거뜬했으나) 많은 박스를 들고 나르는 게 힘들 것이라 여기신 상사분께서는 남자 2분을 내 자리에 넣으시고 나를 입고담당으로 전향시키셨다.
입고는 휴대폰 기본케이스(플라스틱 그 자체)가 EMI실을 거치고 개스킷실을 거쳐 라인까지 오도록, 그래서 S전자에 들어가 휴대폰이 만들어지기 직전까지 케이스 안에 많은 것들을 부착시키도록 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재준비가 필요한 자리였다.
이 자리 역시 자재부 직원들과 경리직 언니들, EMI실 오빠들과 동생, 개스킷실의 오빠, 언니들과 친해질 수 있는 멋진 자리였다. 일도 좋았지만 많은 인맥들과 연결되니 하루하루가 참 알차고 따뜻했다.
공장, 공순이, 공돌이라는 말에 선입견이 있는 분들도 있으실 거다. 그럼에도 그들의 인생들은 손가락질받을만한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오히려 존경스러운 분이 수없이 많았다.
S전자에 다니던 시절, 같은 방을 쓰던 언니들은 일을 다니면서 사내대학을 다녔다. 그 모습 덕분에 열심히 사는 것에 대해 배우게 되었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게 되었다. 2000년도에 들어서며 돕고 사는 게 미덕임을 가르쳐주시고 깨우쳐주신언니들 덕분에 한 단체를 도운 지도 20년이 넘었다.
내가 만약 주부가 아니었다면, 사업을 하지 않았더라면 공장을 다시 찾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그 안에서 마음 맞는 분들을 만나고, 정을 쌓아가다 보면 또 다른 인생을 만날 수 있다. 장담할 수 있다. 내가 그 길을 걸어왔었으니까.
S전자도, S전자하청도, LG계열사 회사도 나에게는 새로운 삶, 새로운 꿈을 안겨주었다.
가진 꿈을 나열하자면 정말 많지만 그래서 이룬 꿈도 많다. 우물 안 개구리 같던 내가 바깥세상을 탐험하며 다양한 경험을 했다.
지나간 모든 시간들이, 모든 순간들이 꿈만 같다. 지금은 또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꿈을 키우며 살고 있다. 아마도 꿈은 이 세상을 등지는 그날까지 꾸고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살고 싶다.
해가 자취를 감춰버리고 어둠이 온 세상을 장악해 버린 지금, 개구리울음소리가 한창이다. 무슨 이야기를 저리 나누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