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사랑이었다

아빠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by 박현주

태산이 높다 해도 아빠사랑만큼 높을까?
태평양바다가 제 아무리 넓다 해도 아빠 마음보다 넓을까?
나에게 아빠는 최고로 높고, 넓디넓은 세상이고 우주였다.







아빠는 직업군인이셨다.
늘 건장하셨고 단단하셨으며 든든했다.
엄마에겐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와 동생들에게는 좋은 아빠이자 따뜻한 아빠셨다.

아빠와의 세월이 고됐던 엄마는 요즘도 내내 아빠를 오징어 씹듯 잘근잘근 하시지만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들어드리면 엄마는 속 시원해지니 좋으실 테고, 나는 효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열심히 경청하는 척이라도 한다.





어린 시절 나는 아빠가 좋았다.
쉬는 날이면 바닷가로 데려가 낚시도 함께 해주시고 차가 생기기 전엔 오토바이도 태워주셨다.
여동생이 앞에 타고 나는 뒷자리에 앉아 아빠를 놓칠세라 힘껏 껴안고 등에 기대어 아빠숨소리, 아빠향기, 아빠의 음성을 맘껏 누렸다. 아빠의 음성이 울려 내 귓가로 진동처럼 들릴 때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따뜻한 말도 아니었고 그냥 일상적인 말인데도 아빠등으로 듣는 이야기는 묘하게 따뜻했다.

시집온 뒤로는 그 추억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신랑이 오토바이를 사 오면서 태워주겠다 했을 때까지도 그 시절의 추억은 내 안중에 없었다.

동네 한 바퀴만 후딱 돌고 오자 했던 어느 날, 헬멧을 벗고 타게 되었고 신랑 허리를 끌어안고 자연스레 등에 기대게 됐다.


나도 모르게 아빠와의 시간들이 오버랩되었고 차후에 내 추억을 신랑에게 전하며 우리는 추억을 공유했다. 이제는 오토바이를 보면 자연스레 아빠가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빠등을 참 좋아했다.
부대관사에 살던 유년 시절, 여름밤마다 관사에 살던 이웃들은 평상에 둘러앉아 수박을 나눠먹으며 이웃 간의 정을 나누었다.


여름풀벌레소리는 매일밤 배경음악이 되어주었고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가로등불빛아래서 매미와 땅강아지를 보며 뒤따르기도 하고 나름 재미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신나게 놀다 보면 잠잘 시간을 늘 놓쳤고, 그런 나는 아빠등에 업혀 집으로 가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잠결이지만 아빠의 목소리가 진동처럼 들려오면 그 소리는 자장가가 되어주기도 했다.
엄마뱃속에 있을 때 아이들이 들을 것 같은 소리, 딱 그 느낌이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모든 추억들은 소박하지만 따뜻했고 정겨웠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추억을 줄 수 없다는 게 아쉽기만 한 지금이다.

친근한 아빠, 대화를 많이 나누던 부드러운 아빠는 아니었지만 츤데레 아빠였고 표현은 서툴러도 아빠마음을 느끼는데 부족함은 없었다.

매달 10일은 아빠 월급날이자 통닭을 먹는 날이었다.
어린 마음에 그날은 또 어찌나 좋던지, 달만 바뀌면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통닭도 그 시절엔 배달되던 게 아니어서 아빠가 퇴근하시던 손에 들려있었다.
나에겐 그 모든 모습이 사랑이었다.

'희망의 끈'이라는 책을 봐도 자식과 부모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떨어지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으면 만날 수 있을 거라 얘기하는데 아빠와 나도 눈에 보이지 않은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그 끈을 놓친 것처럼 느끼셨던 것일까?


내가 실업계고교를 선택했을 때도 아무 말씀 없던 아버지, 은연중에 대학얘기를 흘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던 형편인걸 누구보다 잘 알던 나였기에 돈을 벌 수 있는 학교를 자처했었다. 성적이 아깝다 하신 선생님의 말씀도 그때는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렇게 실업계고교에 진학했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S전자로 취업을 나가게 되었다.
2+1 제도라는 게 있었는데 2년은 학교에서, 1년은 취직해서 돈을 벌면서 학업도 인정받을 수 있는 제도였다.

취업 나가던 그날, 우리 학교에서 S전자로 180명이 취업을 나갔고 S전자에서 버스도 보내주셨다.
선배님들의 성실함을 인정받아 우리 학년이 혜택을 본 케이스였다.





버스를 타기 전 부모님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선생님과도 인사를 나누는데 아빠가 눈물을 훔치셨다. 그것도 아주 많이.
선생님께서는 멀리 가는 게 아니라고 아빠를 다독이셨다.
그런데도 그치지 않던 아빠의 눈물, 무슨 의미였을까?

태어나 아빠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가히 충격적이기도, 나 또한 슬퍼지는 바람에 쉴 새 없이 울었다.
포항에서 칠곡휴게소까지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휴게소에서 한숨 돌리고 나니 조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칠곡을 지나 구미에 들어섰다.

빽빽이 들어선 수많은 공장들, 공장굴뚝의 연기, 모든 것들이 새롭고 신비로웠으나 아빠의 모습이 아른거려 취업첫날이 어찌 흘렀는지 기억조차 흐릿하다.

그 눈물의 의미는 알 수 없었으나 모든 게 사랑이었다 생각한다. 다른 말은 떠올릴 수가 없다.
사랑이었다 여기며 평생 껴안고 함께 가야겠지.

사랑이라지만 가슴 아팠다. 그때 그 시절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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