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살아라. 생각해보면 20대 때 사리면서 살았다. 마음 다칠까 봐 겁먹었다. 지나고 보니까 후회가 된다. 조금 더 막 살걸.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막사세요. 마음도 아끼지 말고 이것저것 경험도 많이 해보고 후회 없이”
드라마 '치얼업'에 나오는 대사다. 인스타를 보다가 얻어걸린 글이었지만 가슴 한편을 찡하게도, 때리기도 하는 글이었다.
나의 20대는 나보다 가족을 위해 살았고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19살, 인생 2막이 시작됐다. 군인아버지아래 아르바이트 한 번안해보고 편하게 살았다. 아버지는 군인이셨음에도 욕심이 많았던 분이라 엄마명의를 빌려 사업도 하셨다. 그때부터 가세가 기울었다. 욕심이 과하며 화가 된다는 걸 그때 몸소 실감했다.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인문계에 진학해서 국문학도가 되고 싶었던 꿈을 접어야 했고 공고진학을 자처했다. 당시 포항에 있는 실업계 고등학교 대부분은 상고였으나 나는 신설학교인 공고에 입학했다. 제일 유망 있는 학과라 하여 '전자통신과'를 갔는데 나름 재밌었다. 천리안, 하이텔, 케텔, 나우누리, 유니텔등 pc통신이 활발하던 시절이었고 그때 채팅을 통해 자판실력이 급상승하기도 했다. 그때 나와 대화를 나누던 많은 사람들은 어떤 모습, 어떤 자리에서 살고 있을까?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새삼 궁금해진다.
처음엔 납땜기(인두기), 오실로스코프 등 생소한 장비와 물건들이 낯설기도, 다가가기 두렵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 나름대로 재미를 찾고 즐기며 뜻깊은 학교생활을 이어나갔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니 새로운 것에 적응은 잘했던 사람이었다.
나의 모교에서는 2+1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2년 수업에 충실하고 1년은 실습이라는 이름을 가장한 취업을 나갈 수 있는 제도였다. 그렇게 19살에 삶의 전쟁터로 내던져졌다. 내가 3회 졸업생이 된 신설학교였지만 1회, 2회 선배님들의 성실함을 인정받아 우리 학과 학생들은 구미에 있는 S전자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월급을 벌어도 용돈을 받으며 살게 되었고, 어느 달은 집에 가는 차비도 아까워 회사에서 밥을 먹으며 버텼고, 집에 안 가는 대신 과자 한 봉지로 마음을 달래며 5백 원을 쓴 게 전부인 달도 있었다. 다들 내놓으라 하는 대기업에 입사한 것을 부러워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냥 그 자리에 안주해있는 게 싫어졌다. 물론 한 번씩 나오는 상여금과 선물들은 돌아서려는 나의 발목을 잡기에 충분했지만 그럼에도 그곳에 있는 나의 마음은 황폐해지고 있었다. 같은 방언니는 사내대학에 다니며 또 다른 미래도 준비하고 있었고 매일 같은 일상, 매일 같은 사람들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에 허우적거리는 나를 발견하고 얼마 뒤 2년여의 공장 생활을 정리하기에 이르렀다. 한 달 놀고 나니 좀이 쑤셨다. 아무 계획 없이 퇴사했던 게 불찰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고 때마침 초등학교 동창의 도움으로 삼성하청업체에 입사했다. 나름 인정을 받아 관리자의 자리까지 올랐고
주. 야근무가 가능한 회사였기에 야간근무를 자원해 9개월간 올빼미 생활을 이어갔다. 그 시간을 알뜰하게 쓰고 싶어서 운전면허도 따고, 연애도 했지만 여전히 가슴한구석은 허했다. 그때 읽었던 책들도 나의 허전함을 채워줄 수는 없었다.
내가 그 시절 사유를 알았더라면 좀 더 뜨겁고 다른 방향의 삶을 살지는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의문도 가져본다. 그래도 이곳이 나쁘지만 않은 이유는 여기서 신랑을 처음 만나게 됐기에 잊지 못할 시간으로 손꼽는다.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L기업에서 반도체검사원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같이 일하는 분의 형수님이 그곳 관리자로 계시는데 방진복(무진복)을 입고 근무하는 곳이기 때문에 깨끗한 근무환경이고, 여기보다 월급도 좋다는 말에 여럿이서 이직을 했다. 그곳의 생활도 나쁘지 않았다. 롤로 연결된 반도체를 걸어두고 현미경으로 검사하던 검사직이었는데 힘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었다. 아기 다루듯이 조심히 다뤄야 되는 것 말고는 스트레스도 없고 분위기도 좋아 뼈를 묻으리라 다짐한 적도 있었다.
이직한 직장은 3교대라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 이후부터 책을 다시 접하기 시작했고 책은 늘 나의 베프가 되어줬다.
책이랑 놀며 조용한 시간들을 자주 즐겼다. 룸메이트도 교대시간이 달라 나만의 시간을 누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기술이 발달해 심심하면 휴대폰과 한 몸이 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나가서 다 같이 한잔 걸치는 게 전부였던 시절이었는데 나는 그럴 여유가 없으니 늘 기숙사의 지킴이로 있었다. 나만의 시간들이 차츰차츰 쌓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곳 또한 내가 원하던 곳이 아니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20대의 나는, 지금 시대의 20대처럼 즐기는 건 안 했다. 아니 못했다. 이때까지도 용돈을 타며 지냈고 내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엄두도 못 냈고 낼 생각조차도 못한 걸 보니 나도 참 어리숙했던 것 같다. 나는 내 목소리를 여전히 못 내고 있었고 내 나이도 어느새 20대 중반을 향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부모의 힘겨움이 보기 싫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으리라 짐작된다.
여유로웠던 시간 때문이었을까? 또다시 꿈을 꿀 수 있었다. 그 꿈은 바로 간호조무사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S전자를 퇴사하고 집으로 향하던 때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었고 도착하자마자 병원일을 하고 싶다고 엄마께 말씀드렸으나 극구 반대하셨다. 엄마의 비위가 약함은 필히 알고 있었고 바로 눈앞에서 오토바이사고를 목격하시고 나서는 '피'라는 것을 엄청 두려워하셨던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는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부모말을 거역하는 건 내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몇 년이 지나고 접어두었던 소망이 꿈으로 변하며 나를 움직이게 했다. 엄마께는 간호학원을 알아보고 입학허가가 떨어지고 나서야 통보를 했다. 그제야 나의 꿈을 인정해주셔서 간호조무사가 될 수 있었다. 간호조무사가 되어서도 가족을 위해 모든 걸 헌신했다. 그러나 남는 건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나의 이력, 나의 추억,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나의 20대는 가족을 위해 살았고 나는 없었다. 그때의 나에게 한마디를 해준다면
"나를 찾는 일에 용기를 내고 나를 위한 투자를 아끼지 마라.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은 망설이지 말고 후회 없이 해라"라고 하고 싶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용기도 없었고 힘도 없었다. 그냥 정해진 수순대로 걸어왔다. 내가 조금 보탠다고 어려워진 가정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는데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그냥 조인 숨통에 구멍하나 뚫어준 게 다였는데 큰 도움이었을 거라는 착각으로 나의 20대를 쏟아부었다. 착각이었단 사실은 지금에서야 깨달은 정답이다.
여행도 단 한 번 못 가보고 자기 계발은 더더욱 못했다. 조금은 이기적이게 살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던 내 시간에 대한 아쉬움에 급격히 씁쓸해진다. 그렇게 씁쓸했고 가여웠던 20대였지만 그래도 내 인생이니까, 그 시간조차도 나였기에 사랑한다 해주고 싶다. 애썼다고, 수고했다고 다독여주고 싶다. 지금의 20대, 그리고 나의 아이만큼은 나처럼 살지 말길 바란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