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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주 Dec 24. 2023

비움의 맛을 알아버렸다

토요일, 오전근무를 마치고 제사장을 보고 집으로 왔다.
미리 장을 봐두었지만 미리 살 필요 없는 것들은 제사당일인 토요일에 구매를 했다.
모두가 크리스마스기분에 들떠있지만 제사생각마음이 분주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동서와 제사음식을 준비했다.
동서네와 우리 집만 참석하는 제사라 음식을 많이 하진 않지만 그래도 정성을 쏟아야 했다.
시금치를 다듬는데 신랑은 청소를 하며 나를 호출해 댔다.
집에 있는 책을 모조리 뺄 기세였다.
제발 제사 준비 좀 하고 하자했지만 마음먹으면 해야 되는 신랑은 기어이 책을 빼내기 시작했다.
결국엔 책장까지 빼버렸다.
처음에는 보는 책만 물어보더니, 안 되겠던지 아이들을 심문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처음부터 책을 다 뺄 기세였다. 무나물을 볶고 있는데 또 호출이다.
제발 제사준비 좀  하자며 날을 세워 이야기했다.
신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실에 있는 책장하나를 싹 비워냈다.
아이들 방에 있는 책도 반을 비웠다.
제사준비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안 날지경이었다.
다행히 8시경 제사준비가 끝났다.
그 당시는 짜증이 났지만 훤해진 집을 보니 개운하긴 했다.





다음날인 오늘 아침, 밤새 코를 골았다며 신랑이 약을 올렸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그랬겠냐며 억울함을 쏟아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청소이야기를 꺼낸다.
아이들 방에 있는 내 책 때문에 아이들이 제대로 생활을 못한다나 어쩐다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내가 읽는 책이랑 내 물건들을 빼내보니 방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내 짐은 작업실로 옮겨두고 아이들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책장 두 개 중 하나가 빠져나오고 안 읽는 책, 공책들을 정리하니 책장이 휑해졌다.
그 덕에 자기들이 아끼는 물건들을 올려놓기도 하고 공간을 나누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미안해졌다.





정리를 늘 꿈꿨지만 방법을 몰랐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막막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인 것 같다.
일단 다 빼라는 신랑의 진두지휘 아래, 우리는 움직였고 내 작업실은 꽉 차버렸지만 아이들 방은 넓어졌다.
정리정돈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음을 오늘 피부로 느꼈고 확실히 알았다. 난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몸은 고되었지만 비우고 나니 홀가분해진 기분은 최고였다.
왜 성공한 사람들이 정리정돈을 잘하며, 중요시하는지 알 것 같았다.
물건을 찾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고 여유가 생기니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빼낸 책들은 예전에 기부했던 '비전도서관'에 다시 기부했다.
어찌나 고마워하시던지 몸 둘 바를 몰랐다.
나는 가져가주시니 감사한데, 서로 감사하다며 연신 인사를 나누었다.

아직 작업실은 포화상태지만 원단정리도 들어갔고 내 책도 정리를 이어갈 것이다.
비움의 맛을 알아버렸으니 미니멀한 삶도 꿈꿔보고 싶다.
이틀간 청소를 해보니 왜 미니멀라이프를 추구하자고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개운하고 후련하다. 비워냈을 때 채울 수 있는 공간만큼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니 이보다 더 훌륭한 일은 없는듯하다.


글을 쓰고 나니 미니멀하게 살고 싶어 진다.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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