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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주 Feb 23. 2023

누룽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졌다

구내염 앓는 신랑

구내염이 목구멍 입구에 생겨버린 신랑.
침을 줄줄 흐르게 하고 저 세상의 통증을 선물하는 알보칠이라는 약으로 상처를 문질러봐도, 구내염에 쓰이는 디클로페낙(소염진통제)이 들어있는 가글액을 써봐도 도통 나아질 기미가 없다.

일주일 동안 매운 것조차 마음껏 먹지 못하는 걸 보고 있자니 안쓰럽기도, 측은하기까지 하다.
늦게까지 일을 하는 경우도 많았고 주말에도 하루 빼고 쉰 적이 없다. 자기는 아니라지만 아무래도 몸이 고되다 보니 쉬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것만 같아 보였다.

목상태 덕에 아침마다 누룽지로 끼니를 대신했다.
거기에 계란프라이 한 장, 김치 조금, 구운 마른 김 몇 장과 간장만 있으면 거뜬히 한 그릇 걸치고 출근길에 나섰다.


요즘은 아침 6시도 깜깜하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달과 별을 보고 출근길에 나섰다.
현장으로 떠나는 차의 뒷모습을 보면서 늘 기도했다.
'오늘도 무사히 잘 마치고 돌아올 수 있게 보살펴주세요, 30분 동안 운전해야 되는데 운전대도 지켜주세요'라며 나만의 의식을 하고 난 뒤, 자동차의 불빛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나서야 나는 집으로 들어왔다. 요즘은 구내염도 빨리 낫게 해 달라는 기도를 더한다.

며칠 전 제사가 있었기에 잠이 부족해서 그랬던 것일까? 구내염은 입안을 정복이라도 할 작정인지 지름이 1센티를 넘길 만큼 커져버렸다. 얄밉고 미웠다.
감히 우리 신랑을 괴롭히다니 용서할 수 없다.


수액맞는 신랑 & 울집 노견 하늘이



주사제를 구해와 수액치료를 했다. 이럴 때는 기술을 배워둔 게 요긴하게 쓰이니 감사할 뿐이다.
신랑의 아픔은 아이들이 아픈 것만큼 속상하고 가슴 아프다.
가족 누구라도 아프면 그러할 테지만 건장하던 신랑이 콩알크기만 한 염증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보니 안쓰럽기도, 속상하기도 다.

약까지 받아와 일주일째 치료 중인데  오늘은 감기기운까지 있는 것 같다며 골골거린다.
진짜 용서하고 싶지 않은 병이다.

신랑은 원래 저녁을 거하게 먹는 편인데 오늘은 목 넘김조차 괴롭단다.
나는 또 어김없이 누룽지를 끓였다.




남는 밥이 생기면 늘 프라이팬에  올려 약한 불로 은은하게 구워 누룽지를 만들어 놓는다.
만들어서 1인분씩 분리해 포장을 해두고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끓일 때 하나씩 꺼내 쓴다.
누룽지 샀다가 낭패를 본적이 많아서 이제는 꼭 만들어먹는다.


 

물에다 누룽지 한 봉지를 부어 넣고 밥을 한 주걱 넣는다. 거기에 숭늉가루를 대충 한수저정도 넣고 강불로 끓인다.
보글보글 끓으면 넘치기 직전, 불을 약불에 놓고 불리듯 끓여서 한 그릇 뜨면 완성이다. 물을 많이 넣고 끓이면 숭늉도 대령하는 아주 고마운 요리이다.


숭늉가루+누룽지


누룽지를 구운 즉시 먹어보면 끝내주는 간식도 된다. 어릴 적엔 설탕도 뿌려먹고 라면수프도 뿌려 먹었다. 튀긴 누룽지는 말이 필요가 없다. 튀김은 언제나 옳듯이 맛은 상상이상으로 끝내준다. 맛있으니 칼로리도 용서되는 최고의 간식이다.

반찬도 딱히 필요 없고, 누룽지만으로도 구수하고 든든해서 한 끼 대용으로는 충분하다.


나도 오늘은 신랑과 고통을 함께 하고자 누룽지를 먹었다.
한 숟갈 입으로 가져가  넣었더니 약간의 쫄깃한 식감에 고소함이 더해지니 천상의 맛이 따로 없었다. '이렇게 맛있었나?'

신랑의 고통은 안중에 없고 누룽지의 매력에 흠뻑 빠져 한 그릇 뚝딱 해치웠다. 다 먹고 나니 정신이 드네. 신랑아 미안.

요즘 매일 한, 두 끼는 꼭 끓이게 된다. 이거 먹고 툭툭 털고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밥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마구 해줬으면 좋겠는데 아프다는 소리뿐이다. 아프다는 소리는 가장 속상하고 가슴 아픈  말이다.


늘 반주로 소주 한, 두 잔씩 기울였는데 구내염을 앓은 뒤로 술은 입에도 못 대고 있다. 술과 멀어지게 해 줬으니 고마워해야 되나.




누룽지를 먹다 보니 누룽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졌다.
언제 먹어도 부담 없듯 언제 만나도 부담 없는 사람.
누룽지  하나만으로도 든든함과 고소함을 선사하듯 나 자체만으로도 의지되고 같이 있음 맛깔나게 재미있는 사람.
아프거나 입맛 없는 사람에게 훌륭한 식사가 되듯  어렵고 힘겨운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서슴없이 내미는 사람.
숭늉국물까지 마시고 나면 개운해지듯이 나를 만난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구수하고 인정 넘치고 푸근하고 맛깔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한입, 두 입 더해질 때마다 나의 다짐들을 켜켜이 쌓아 꾹꾹 다져 넣어본다.


내일 아침은 밥 먹고 싶다는 소리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언제든 준비되어 있으니 신랑은 빨리 낫기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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