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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주 Mar 03. 2023

새 학기에만 맛볼 수 있는 감정

딸이 중학생이 되었다

재잘재잘 재잘~~

중학생이 된 딸이 집에 오자 가방을 내리지도 않고 쉴 새 없이 종알거린다.


"지금 담임선생님이 6학년 때 선생님이랑 이름이 한 글자 틀려. 6학년샘은 이 O은 이었잖아. 지금 선생님은  이 O 현 이야. 6학년 선생님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날뻔했어."
"전학 간 그 친구 있잖아, 우리 반이더라. 그래서 인사만 했어. 오랜만에 보니 어색하더라고."
"밥 먹을 때 맞은편에 6학년 때 친구 oo이어서 좋더라."
"새 친구 사귀려고 친구한테 너는 어느 가수 좋아해라고 물었는데 처음 듣는 가수이름 얘기하길래  응, 노래 좋더라고만 하고 난 BTS 좋아한다고 했어. 그리고는 이야기가 끊어졌지 뭐야"
"학교가 얼마나 큰지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어"
"학교에서 화장실 갈 때 친구들하고 같이 가지 않아?"
"오늘 사회선생님께 칭찬받았어. 책에 이름 쓰라는데 애들은 작게 작게 쓰는데 나는 대문짝만 하게 썼거든. 그랬더니 선생님이 내 책을 들고서 '이 책 마음에 든다. 이렇게 쓰면 누가 들고 가겠어?'라고 했어."
"친구 많이 사귀고 싶은데 왜 말이 안 나오지?"
"친구 사귈 수 있을까?"
"오늘 버스 타려고 나가는데 길을 몰라서 어쩌지 하고 있는데 OO이 언니를 만난 거야. 그래서 길을 물었더니 학원 가는 길인데도 버스정류장까지 나 데려다주고 갔어. 진짜 착하다. 그렇지?"

"누가 나보고 손을 흔들길래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고 인사해 줬거든. 알고 보니 내 뒤에 있던 애랑 인사를 했던 거야. 부끄러워서 고개 숙이고 교실로 도망을 갔어."

"귀가 시려서 후드모자를 쓰고 복도를 지나갔는데 실내에선 모자 쓰지 마라고 선생님이 모자 벗기셨어. 히터고장 났다던데 그거나 고쳐주시지"



경주여자중학교-네이버지식백과[출처]



딸은 봇물 터지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대답할 기회도 안 주고 열심히 이야기해 댔다.
재잘거리는 거 보니 중학교 첫날이 나쁘진 않았던 것 같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중학교 2학년 때 전학을 가야 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20명 남짓한 남녀공학 중학교에서 50명이나 되는 여중생들만 모인 학교를 갔을 때 또 다른 세상에 대해 가졌던 두려움과 설렘은 아직까지도 내 속에 그대로 남아있었는지 그때의 기분이 역력히 떠올랐다.

다시금 올라온  그때의 기억에 쭈뼛쭈뼛 해졌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전학 갔던 날, 처음 보는 아이들 속에서 아무것도 못해 쭈뼛거렸던 나였지만 친구들이 먼저 내민 인사 덕분에 안 보이던 벽은 와르르 무너졌고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딸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일주일만 지내보라며 응원의 말들로 토닥여주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겐 지극히 내성적으로 보이지만 친구들 사이에선 나름 인싸였기 때문에 크게 걱정되지 않는다.
인기투표로 학교임원도 했으니 나보다 훨씬 능력 있는 친구임은 분명하기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애쓰지 않으려 한다.

오늘도 분명 본인과의 전쟁 속에서 학교생활을 해나가고 있겠지만 그것 또한 살면서 겪어야 하는 일이고 사회에 나갔을 때도 그런 일을 더 많이 마주 해 야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피하기보단 겪어서 이겨내는 강단을 키웠으면 좋겠다.

혼자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닐뿐더러 다른 사람들과 맞대며 살아가는 삶이기에 모든 일들이 도전처럼 여겨지겠지만 기꺼이 이겨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들로 저녁을 꽉 채워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단 한 명의 친구라도 좋으니 친구가 생겼다며 환호하는 목소리를 들려줬으면 좋겠다.


새 학기에만 맛볼 수 있는 감정은 지금뿐이다. 선물 같은 이 순간을, 이 감정을 절대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부는 둘째고 인성을 갖추라는 아빠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좋은 친구들과 한 번뿐인 중학교 학창 시절을 재미나게, 행복하게 보냈으면 하고 바라본다.

너의 중학교생활을 응원해, 그리고 축하해. 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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