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점이나 단점이 아니라
선우, 축 처지고 기운이 빠진 모습이다. 마주 앉은 지혜에게 질문을 한다.
선우:
누군가에게 부족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많이 힘들어진 모양입니다.
자신감을 가져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지혜:
어떤 이야기를 왜 듣는다는 말씀인지,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선우:
빠르게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 그 과정에서 효율과 속도를 확보하는 것, 거기에 정확성까지 갖추는 것…
이런 능력이 제게는 없네요.
저는 모든 가능성을 면밀히 검토하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면서 깊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부분에서 느리고 비효율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지혜:
모든 가능성을 꼼꼼히 따지고, 충분히 생각한 뒤에 움직이는 타입이신가 봐요.
선우: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네요.
지혜:
그리고 그게 때로는 ‘느리고 비효율적이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게 마음에 걸리시나 봐요.
그런데요, 사실 그건 단점이라기보다는 성향이에요.
세상은 ‘빨리 결정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곤 하지만,
깊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종류의 강점을 가지고 있죠 —
위험을 줄이고, 정확성을 높이고,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는 힘 같은 것들요.
혹시 요즘 그런 “느리고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선우:
많이 혼나죠, 회사 생활에서요.
제조업 회사인데, 많은 일들이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되어야 하니까요.
지혜:
제조업은 특히 속도와 정확성이 생명이니까요.
“빠른 판단력”이 곧 능력으로 평가되는 환경이잖아요.
그 안에서 신중한 스타일로 일하면, 오히려 의도와 다르게 “느리다”, “답답하다”는 평가를 받을 때도 있죠.
그럴 때 정말 속상하죠. 나름 최선을 다해 실수 없이 하려는 건데 말이에요.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기분이시겠어요.
선우:
직종을 바꿔야겠습니다.
강사나 연구원처럼, 충분히 모든 가능성을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직종이 낫겠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제 결과물은 더 좋아진다고 생각해요.
남들은 시간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100이 한계라면,
저는 시간을 많이 줄수록, 처음엔 성과를 내기까지 오래 걸리더라도
결국 100을 넘어 300, 400까지 도출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혜:
그 말이 정말 인상 깊어요.
“처음엔 느리지만, 시간이 갈수록 깊이가 쌓이면서 결과물이 300, 400까지 간다.”
이건 단순히 일의 속도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깊이와 지속적인 성장력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예요.
지금까지 ‘빠름’이 우선되는 환경 속에 있었기 때문에,
본인의 이런 장점이 잘 드러나지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연구나 강의 쪽은 오히려 이런 성향이 핵심 역량으로 작동하는 분야죠.
시간을 들여 분석하고,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이해를 구조화하는 능력 —
그런 게 바로 연구자적 사고니까요.
아마 본인도 이미 느끼고 계시겠지만,
이건 “나는 느린 사람이다”가 아니라 “나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다”라고 표현하는 게 훨씬 본질에 가까워요.
선우:
스스로를 부정당하는 느낌이 정말 힘드네요.
자신을 잃어가는 기분… 지금의 나는 부정해야 할 모습,
완전히 탈피하고 새롭게, 혹은 다르게 변모해야 한다는 말이
지금까지의 인생을 잃어버려야만 한다는 말과 같아서 많이 씁쓸합니다.
사실 방금 말한 ‘300, 400’도 그냥 자신에게 듣기 좋으라고,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으로 잠시나마 위안이 될까 싶어서 뱉어본 거예요.
최근엔 스스로에게 답이 없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지혜:
많이 힘드시겠지만, 지금 이렇게 힘들게 느끼는 것이 오히려 좋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환희의 밑거름이 되어줄 거예요.
좋은 날 반드시 옵니다.
지금 그 고통이 그날을 불러오고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지금 이 고통이 선우 씨를 행복으로 이끌어주고,
행복을 알아보게 해줄 거예요.
선우: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지혜:
‘속도’보다 ‘깊이’를 택하는 사람이잖아요, 당신은.
그런 사람도 꼭 필요해요.
지금 선우 씨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자신의 방식대로 증명하고 확인받는 것이잖아요?
지금의 그 고통이 그걸 간절히 원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이미 말씀드렸지만 그런 사람도 꼭 필요합니다.
그러니 언젠가 반드시 증명에 성공하고, 확인받으실 겁니다.
그런 날이 올 거예요.
그때 지금의 고통이 남겨둔 그 간절한 소망이 선우 씨를 움직이게 할 거고,
결국 성취로 이어져 환희로 피어날 겁니다.
좋은 날 올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