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영혼과 일치되는 것이 부정당하지 않을 권리
관점의 다름. 한쪽의 창으로만 봐서는 깨달을 수 없다는 걸 왜 다들 모를까?
견해 상충. 그 한 켠에 싹튼 감정의 다툼, 상처 될 말들, 단정해 만든 차별의 감투, 색안경에 가둔 한정된 반추. 잘못 꿴 단추를 바로 채운 다음, 주위 낯선 세상을 발견해봐.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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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시각 밖의 것을 무시하는 듯이 각박해진 마음으로 상대를 하나둘씩 압박해. 무언가 낯선 것들이 마치 칼날, 송곳인 양 두려워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우린 하나의 테두리 속에서 함께 빈틈을 메꿔가는 Tetris. 서로가 쥔 조각이 좀 맞지 않을 때도 있어도 각기 어떤 가치를 또 갖지. 모두가 똑같이.
노래 제목: Harmony
래퍼: 화나
다르다는 것은 틀리다는 것일까. 왜 우리는 다르다는 것에 그렇게 적대적일까? 그리고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는 ‘틀린 것’과 ‘다른 것’의 구분.
다름이라는 이름의 자유, 그 다양성이 가지는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안다면 그들의 인생도 더 풍요로울 텐데.
요즘 세상은 ‘정해진 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 틀 안에 얼마나 부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틀 밖에 난 것은 틀린 것으로 치부한다.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다르다는 것의 자연스러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다.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특성을 가진, 타인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인 권력을 가진 인간이 다른 인간을 자신의 기호에 맞추어 통제하려고 끊임없이 고군분투한다. 이건 이해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는가.
개성은 세상 만물에 깃들어 있다. 길가에 있는 나무나 꽃만 보아도, 같은 종에 속하는 것들이 모두 다 제각기 다르게 생겼다. 똑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다름은 자연스러움이다.
그러나 특정 주체가 자신만의 특징으로 제작한 금형으로 세상 모든 것을 플라스틱처럼 녹여다가 일정한 모양으로 사출하려고 드니, 제 개성으로 자신만의 모습을 지니던 많은 것들이 가열되고 녹여졌다가 다시 금형이라는 틀에 주입된 채로 식어져 일정한 모습으로 변모되는 그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신음할 수밖에 없으리.
정말 한심스러운 말이 이것이다.
“야, 저 사람은 할 수 있는데 너는 왜 못하는 거야?”
“야,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하는데, 넌 왜 그러는 거야?”
“다들 그냥 그렇게 하는 거야. 그렇게 해왔던 일이야.”
이 말의 전제는 사람은 다름보다는 같음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같음이 미치는 영향이 다름의 그것보다 압도적으로 지대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왜 그렇게 편협한가. 자신에게 보이는 것만 전부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 그리고 왜 그렇게 오만한가. 자신에게 보이는 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
나에게는 어려운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쉬운 것일 수 있다.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어려운 것이 나에게는 할 만한 일일 수도 있다. 노력의 대명사로 자주 거론되는 김연아는 피겨스케이팅을 연습하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적잖다. 운 적도 있고 짜증스러운 모습을 보인 적도 있다. 그래도 그녀는 묵묵하게 피겨스케이팅 연습을 꾸준히 이어나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그녀의 묵묵한 꾸준함, 그 묵직함에 주목하고 감탄한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으니, 만약 그녀가 그 어떤 다른 길을 선택했다고 해도 그런 묵직함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격투기를 수련한다면 어땠을까? 공부를 한다면 어땠을까? 어려운 스도쿠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다크소울과 같이 어려운 게임을 한다면? 그래도 똑같았을까?
내가 내린 결론은 ‘아니오’다. 그냥 피겨스케이팅을 했으니까 그랬던 것이다. 물론 다른 어떤 분야에서도 그런 묵직함을 가질 수 있었겠지만, 단언컨대 그 묵직함은 그녀에게 일반적인 특성은 아니다. 단지 피겨스케이팅에서 그녀는 묵직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피겨스케이팅은 할 만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김연아는 하는데 넌 왜 못하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대단한 그녀의 업적을 일반화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가진 개성, 즉 다양함이라는 이름 아래 그런 일반화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고가 아니다. “아, 쟤는 그냥 그런 친구구나.”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견하게 될 개성에 대한 시각의 중립화가 필요하다.
그 개성을 딱히 좋게 보아야만 한다는 이유는 없겠지만 그것을 특별히 부정적으로 보아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이겠는가. 누군 키가 크고, 누군 작고, 누군 얼굴이 크고, 누군 작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인데 그것이 꼭 좋다 나쁘다로 평가되어야 하는가? 그 사람은 그냥 그런 것이다. 태양과 달 중 무엇이 더 가치있다고 평가되어야 하는가? 삶은 열매거나 꽃인 것이다. 당신은 그저 예쁘거나 아름다운 것이다. 무엇이 맞고 무엇은 그르다고 할 수 없는 것들, 그냥 그건 그것으로 존재하는 것, 그것들이 우리다.
물론 개성이라는 것은 자유라는 이름과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통제되어야 하는 부분도 있다. 개성이 타인의 개성을 침해하는 순간, 그것은 존중받을 수 없다. 이것은 그 개성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타인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은 제재되어야 한다는, 공룡 시절부터 - 먼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던, 사회라는 것에 원초적으로 내재되어 있던 규칙이기에 준수되어야 한다.
그런 부당한 침해를 야기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타인에 의해 자신의 개성이 평가되고 판단되어 통제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 세상의 모습이 안타깝다. 왜 그렇게 사람들은 익숙한 것만 좋아할까. 그리고 그 선호에 따라 주변 모든 것을 자신에게 익숙한 것으로 획일화시켜 버리려고 할까. 타인의 개성을 녹여서 없애버리고 자신이 만든 틀에 넣어 식힌 다음 굳혀버리는 그 과정의 잔혹성을 잠시 생각해보는 여유는 없는 것일까. 세계적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주요 독재 국가들의 획일화된 모습을 회고해보라. 그것에 무슨 활력이 있던가.
자신과 비슷한 것과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자신과 다른 모습, 같지 않은 것과도 얼마든지 무난하게 어우러질 수 있다. 단지 타인에 대한 판단 — 무엇이 좋고 나쁘다는 편견을 뒤로 미루어 둔다. 그리고 타인의 다양성에 대해 ‘그럴 수도 있다’는 중립적인 시각을 갖는다. 자신의 개성을 침해하는 타인의 개성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이 전부다.
단언컨대, 위 3가지는 대부분의 이에게 사실 어렵다. 무엇인가를 판단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많은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의문을 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자신의 개성을 침해하는 타인의 개성에 대해 용기 있게 저항해보기란 사실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타인의 개성을 침해하는 우를 범하는 자는 타인을 강제하는 권력이라는 힘을 가진 사람이니까.
무엇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해져 있는 그 틀 안에 순응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예로부터 무리에서 버려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에, 우리는 무리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에 민감했다. 공감 능력을 키우기 위해 훈련되었고, 적응되었다. 이 또한 우리의 본능이니까. 하지만 우리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게 되면, 한 인간의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사회에서 그토록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돈이나 명예, 사회적 지위나 풍부한 인적 네트워크 등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나답게, 그리고 나에게 맞게 산다는 것. 그리고 다양함이 주는 풍요로움을 누린다는 것.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