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슈알라
1980년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시절, 말단 공무원이 외국 연수에 참가한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6개월간 집을 떠나니 걱정도 되었지만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여서 기대도 컸다. 농업 공직자로서 국제적 감각을 익히는 역량 개발 과정이었다.
출국 전 남산의 중앙정보부(1981년 전두환 정권 시절 안기부로 개칭)로부터 교육을 받으라는 연락이 왔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서운 권력기관으로 알려졌다. 정치와 관계없던 나는 두려워할 일 이 없었다.
알려준 주소대로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정문에는 ‘종합유통 상사’?라는 비밀스러운 안내판이 걸려 있었다. 정문은 철조망으로 감싸인 육중한 철제 대문이었다. 삐걱거리며 열리다 만 출입문 틈새로 들어가니 무장한 군인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중요한 군사시설을 지키는 병사들 같아 문에서부터 기가 죽었다.
교육 참가자들은 해외 출국을 앞둔 공무원, 공기업 관련 직원들로 30여 명 정도였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사명감으로 많은 성과를 기대한다는 당부와 입출국 주의사항, 비상시의 대처요령’ 등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들 이였다. 교육이 종료됐는데 이집트로 가는 우리 일행은 다른 방으로 다시 오라 하였다. '카이로에 있는 동안 북한 관계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때 주의해야 할 이런저런 말을 듣는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도쿄 나리타공항에서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Egyption Air’로 환승하였다. 중동을 거쳐 카이로에 도착하는데 16여 시간이 소요됐다. 우리와는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이집트, 카이로의 스핑크스나 피라미드는 물론이고, 새까만 아프리카 공무원들도 신기했다. 카이로 시내에 넘쳐나는 수많은 관광객들에 놀랐다. 크고 작은 이슬람 사원들이 우리나라 교회처럼 많았다. 정해진 시간마다 들리는 예배음악과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들은 불편해 보였지만 얼굴은 한없이 편안한 표정 들이었다.
현지인들은 "인슈 알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모든 것은 알라의 뜻이므로 그에 따르라는 것이다. 관공서에서 게으름 피우며 일을 늦게 처리하는 것도 '인슈 알라' 한마디면 그만이다. 각자의 인생은 알라의 것이니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도 신의 뜻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이슬람 생활방식이다. 우체부 집배원들은 길거리 우체통을 두드려 우편물이 어느 정도 채워진 듯한 묵직한 소리가 들리면 수거해 가고, 그렇지 않으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우체통은 열리지 않는다. 우편배달도 집배원의 마음에 달렸다. 이런 것들 모두가 인슈 알라이다.
아프리카 연수생들은 첫인사에서 ‘김일성의 안부’를 물으며 ‘우리는 친구다’라고 하였다. 당시 북한은 소련을 등에 업고 아프리카로 일찍부터 진출하여 이집트와는 대사 관계를 맺었고 우리와는 영사 관계였다. 북한의 근로자들이 아프리카에 많았던 때이다. 어떤 택시 기사는 한국 대사관을 찾는 손님을 북한 대사관 앞에 내려주는 해프닝도 있을 정도로 남북한 구분을 못했다고 한다.
연수과정이 진행되던 어느 날, ‘세계 무역박람회’라 하여 아프리카, 동남아권의 개발도상국에서 생산한 공산품을 전시하고 홍보하며 수출입 상담을 하는 견학 기회가 있었다. 나라마다 부스를 설치하고 자기네들 생산품을 자랑스럽게 전시하고 있었다. 중정에서 말했던 그 행사였다. 멀리서도 선명한 붉은 글씨 “조선 인민공화국 김일성 수령님 만세”라는 대형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영어와 불어도 있었지만 한글로 쓰인 초대형 현수막에 섬뜩하였다. 우리는 궁금하면서도 긴장됐다. 전체 연수생들이 줄을 지어 이동하였다. 같은 민족끼리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우리 입장을 아프리카 연수생들은 모른다.
북한 전시관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흑인들 한 떼가 둘러서서 무언가를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예쁜 한복을 차려입은 유치원생 여자아이가 김일성 일대기를 그린 만화책을 유창한 불어로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집에서 어리광이나 부릴 5~6세 어린 아기가 거침없이 김일성을 설명하다니 그들의 주체사상 교육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불어를 알아듣진 못해도 그림만 보아도 잘 아는 나와는 달리, 아프리카 연수생들은 매우 신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북한 전시장 3개의 방마다 2~3명의 북한 종사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곳들을 둘러보면서 다시 한번 내 눈을 의심하였다. 국제 전시관이니 물품들을 선별해서 왔을 텐데 건축 기구, 볼트, 너트, 고무신, 버선, 버섯 등 조잡한 제품들을 보는 순간 말로만 들었던 그들의 경제 수준에 충격적이었다. 굶주림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북한 동포들의 생활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일행 중 전남도의 류 선생님이 북한 종사원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그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국말로 퉁명스럽게 “어디서 왔어”라며 노려보았다. 주변 종사원들 역시 불쾌한 인상으로 우리를 감시하였다. 우리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남북 농사 문제를 자연스럽게 나눠보고자 했던 우리의 뜻은 통하지 않았다. 세 개의 방을 다 둘러보았지만 김일성을 찬양하는 그림이 대부분이었다. 무리한 행동을 섣불리 했다가 불의의 사고라도 나면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일행들과 함께 전시장을 나왔다. 북의 경제 수준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우리와도 접근 자체를 싫어했던 거 같았다. 행사장 멀리서 김일성 현수막 사진만을 찍었다.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자 중정에서 보고를 하라는 연락이 왔다. 출국 당시 주어졌던 일에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생각한 우리는 불안했다. 보고장 분위기는 예상대로 썰렁하였다. 작은방으로 한 사람씩 들어오라 하였다. ‘목소리가 작으니 크게 말하라’ 하였다. 내 목소리를 녹음했던가 보다. 지참했던 귀국 보고서와 사진 한 장만을 내 보였더니 실망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수고했다’는 한마디만 남기고 나가버렸다. 중정을 나서면서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엄청 혼쭐났다고 하였다. 특히 농수산부 유 씨는 팀장으로서 제 몫을 못하여 질책을 당했다고 했다.
당시 남북 관계는 극한 대립 상황으로 대화는 단절되었다. 북의 지도자는 은둔 상태에서 걸핏하면 충돌과 납치 사건이 터졌다. 어디서 어떤 도발이 발생할지 긴장의 연속이었다. 우리 정보 관계자들은 어떤 방식이든 북의 동향을 파악하여 우리의 국방과 대응 태세를 갖추고자 했을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뭔가 기여했어야 했는데 마음뿐이었다. 당시 한국은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식량 자급 달성과 백색 혁명으로 농가 소득증대에 온 국력을 다 하던 시기였다. 중앙정보부의 일은 우리에게는 능력의 한계였다.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인사들과 내 외부 감시 대상자를 고문했던 공포의 중정이, 오늘날 인권·평화 같은 민주주의 미래를 그려보는 공원으로 변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