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어르신의 난초 같은 삶
‘10년이면 강산도 변 한다’라는 말이 있다. 요지부동 할 거 같은 강과 산이 변할 만큼 긴 세월이란 뜻이다. 더구나 100년이라면 강산이 10번을 변했다고 할 수 있으니, 가히 상상조차 어려운 오랜 세월이다.
2020년 여름 어느 날, 우리 고장 면사무소 회의실에서는 장모님의 100수 잔치 행사가 있었다. 가족들이 조촐하게 마련해 드린 생신잔치였다. 정부에서 100세 노인께 드리는 ‘청려장(장수지팡이)’도 하사 받으셨다. 장모님이 태어나셨던 1921년은 조선왕조 시대였지만 일제의 강점기로, 남자들은 징용과 강제노역으로, 처녀들은 위안부로 끌려가고, 피땀 흘려지어 놓은 곡식은 수탈당하던 암울한 시기였다.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로 허기를 달랬던 시절이었다.
아무리 100세 시대라고들 하지만, 100년 전에 태어나신 분이 지금껏 건강을 지키시며 가족들과 행복을 누리시는 어른은 ‘하늘이 내려주신 축복’이라는 말 외에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남다른 건강을 타고난 것도 아니고, 특별한 보약을 드신 것도 아니고, 흔히들 말하는 유산소 운동을 하신 분도 아니다. 102세가 될 때까지 거동이 조금 불편하고 귀가 어두워진 것 말고는 아직도 기억력도 좋으시고, 목소리에 힘이 있고, 농사일을 챙기실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시는 비결은 무엇일까.
장모님은 텃밭을 관리하고, 살림살이를 챙기며 몸을 쉴 새 없이 움직이셨다. 자식들은 ‘힘에 부친 농사일은 그만하시라’고 성화를 대도 소용이 없었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며 텃밭에 주저앉아 살아있는 생물들과 교감하시며 농사철을 보내셨다. 철 따라 씨 뿌리고 비료 주고 풀을 매고 정성 들여 가꾼 곡식을 자녀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낙으로 삼으셨다. 음식은 과식하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적당히 드셨다. 다행히도 소화기능이 좋아 무엇이든 잘 드셨다. 김치와 된장을 좋아하셨으니 발효식품에 면역력이 길러지셨을 것이다. 집안 살림에도 관여하셨고 때로는 곧은 성격을 보이시며 가족들과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하셨다. 당신 뜻에 맞지 않은 일은 맘에 들 때까지 계속하셨고 그렇게 되도록 가르치셨다. 7,8십대 노인이 된 자식들도 당신에게는 지금도 애기들이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셨다. 명절 때나 제사 음식은 따뜻할 때 이웃에 나눠주시고, 정부에서 지급하는 생활비를 조금씩 모아서 백만 원씩 이웃 돕기 성금으로 내놓아 주위를 놀라게도 하셨다. 20여 년 전에 고인이 되신 장인어른께서는 생존해 계실 때 이곳저곳 전답을 희사하시어 마을 발전에 기여하셨다. 심지어 집 앞 빈터를 마을 곡물 건조장으로 내주시어, 가을이면 처갓집이 먼지를 뒤집어쓰는 불편까지 겪고 있다. 내외분들 모두가 남을 돕는 천성을 타고나셨던 거 같다.
장모님은 고전 소설과 원불교 경전을 머리맡에 두시고 늘 글을 읽으셨다. 그러면서 선인들의 명언과 옛이야기를 가족들에게 전해 주셨다. 한마디 말씀마다 우리 세대에 들을 수 없던 생소한 말과 사투리는 그대로 옮겨도 시가 되고 소설이 될 만하였다. 평소 말하기를 좋아하시며 우스갯소리도 한 마디씩 던지셨다. 그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었고 매사를 편하게 생각하셨던 거 같다. 그래서 지금도 치매와는 거리가 먼 분이시다.
온갖 풍파를 이겨내며 강인하게 살아오셨던 성품과 특유의 체질을 가지셨겠지만, 어른을 지극정성 모시려는 자식들의 효심에서도 가능했던 일이라 믿는다. 큰처남 내외분은 서울에 사시다가 노모를 직접 모시기 위해 귀향하여 노후된 집을 수리하고 어머님의 텃밭농사를 이어받으면서 농부가 다 되었다. 처남댁 역시 서울 살림을 뒤로하고 자식 손자 뒷바라지도 손을 뗀 채 노모님 모시는데 온갖 정성을 다하신다. 처남 내외가 내려오자 장모님은 윤기 나는 난초 잎처럼 더 생기가 도셨다. 기운이 다 되신 노모를 모시는 일은 자식 된 도리로 당연한 일이지만, 하던 일을 멈추고 집을 비워둔 채 귀향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거 같다. 세상살이 힘들다 보니 부모님이 늙으시면 요양병원에 모시지 않던가. 장모님 댁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아졌고 훈짐이 났다. 동네 어른들은 요즘 보기 드문 효자 효부가 나왔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장모님은 이씨조선 말기에 삼계면 삭령 최 씨 가문에서 출생하셨다. 혼기에 이르자 세종대왕 후손 영해 군의 후손, 종가 댁 맡 며느리로 출가하시어 가문을 이어오셨다. 그동안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다 겪으셨던, 우리나라 근현대사 역사를 온몸으로 체험하신 분이며, 움직이는 도서관이시며, 이 씨 가문의 산 중인이시다. 옛 시절 완고한 어른들의 만류에도 자녀들 교육 때문에 거처를 전주로 옮기는 단호함도 보여주셨다.
법정 스님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으니 가난한들 무슨 손해가 있으며,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으니 부유한들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라고 검소한 생활을 가르치셨다. 장모님은 평생 동안을 검소하게 살면서도 어려운 이웃을 항상 잊지 않으셨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몸이 늙어도 계속 배워야 한다. 희망을 가지고 용기를 잃지 않으면 젊게 살 수 있다”라고 강조하였다. 죽을 때까지 공부해도 다 배우지 못해서 더 배워야 한다면 인생 100세도 짧다면 짧다. 장모님은 지금도 책을 놓지 않고 무엇인가를 날마다 읽으며 말씀을 하시니 뇌세포도 쉴 새가 없을 것이다.
의료기술이 발전하여 누구나 100세 시대를 살 수 있을 거 같아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구 온난화와 오염에서 파생된 기후변화는 산과 강뿐 아니라 인간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심각해지고 있다. 전국에 100세 이상 인구는 2만 명이 넘었지만, 누구에게나 장수의 복을 장담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화재와 폭설, 코로나 팬더믹 등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재앙들이 매년 증가하기 때문이다. 또한 100세 시대가 노인들에게 축복일지 아닐지는 알 수가 없다. 건강하고 즐겁게 산다면 좋겠지만, 병고에 시달린다면 축복이라 할 수가 없다.
이럴수록 내 삶의 방식을 찾아 슬기롭게 대처하려면 철저한 자기 관리가 요망된다. 장수 비결이 아닌 건강비책이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내 눈에 보인 장모님의 장수 비결은 특별한 것을 알 수 없지만, 좀 더 가까이서 모셔봐야 할 거 같다. 손을 잠시도 놀리지 않으시며, 단순하게 사시며, 작은 것에도 만족하셨다. 당신만의 생활 습관을 그대로 유지하며,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난초처럼 살아오셨다. 원불교 경전대로 매사에 절제하며 마음을 잘 다스리는 어른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