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사람들
할아버지는 밤마다 책을 읽으라 하셨다. 할아버지는 책 속의 이야기에 빠져드시어 “아 저런, 허허 참”등 장단을 맞추시다가 눈물을 흘리셨다.
당시 중학생이던 형은 매일 밤 고전소설 읽어드리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사랑방에 같이 지내던 나와 동생도, 옆방의 일꾼들도 밤에 듣는 옛날이야기는 라디오 연속극처럼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사랑방에는 춘향전, 이춘풍전, 토끼전 등 재미있는 책들이 많았다.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일꾼들의 땀 냄새가 퀴퀴해도 책 속의 얘기가 좋았다. 머슴 아저씨들이 모여 앉아 새끼 꼬고, 가마니 짜고, 덕석을 만들면서 구수한 대화를 나누는 곳도 사랑방이었다.
우리 집은 터가 넓었고 대문은 항상 열려있었다. 열린 문으로 복이 들어온다기 때문이다. 안채와 사랑채는 담으로 가려졌지만 중문으로 왕래하였다. 안채는 기와집에 넓은 마당과 텃밭에 연결돼 주로 여인들의 활동 공간이었다. 사랑채는 할아버지와 일꾼들이 사시던 곳이다. 할아버지를 찾아오시는 손님들과의 상담 장소이기도 하였다. 사랑채 마당 한 곳에는 모정이 있어 여름철에 마을 사람들의 쉬는 장소였다. 대문으로 사람들은 자유롭게 드나들었으며 잘 곳 이 없는 사람은 하룻밤씩 쉬어가기도 하였다.
사랑채 문밖에는 쇠죽을 끓이기 위해 올려진 가마솥 아궁이가 있다. 이곳에 불을 지피면 구들장이 서로 연결된 세 개의 방은 동시에 따뜻해졌다. 쇠죽을 끓이는 사랑방 아랫목은 늘 뜨거워 누렇게 변했다. 방바닥은 대나무 죽석(竹席)으로 반질거렸고 양말에는 미끄러워 맨발로 살았다. 우리가 밤에 덮고 잤던 이불은 광목이었다. 오래되어 해어지고 무명 솜은 뭉쳐져서 이리저리 밀려다녔다. 그래도 잘 때는 배를 덮어야 하니 이불을 서로 잡아당겨야 했다.
할아버지 방에는 두 칸짜리 벽장(壁欌)이 있었다. 한 칸에는 이불을 넣어두셨다. 다른 한 곳은 외출하실 때 쓰시는 갓과 골패(骨牌)와 장기, 바둑 등 놀이기구는 물론 소주병도 있었다. 책력(冊曆)은 할아버지께서 손님들과 상담하실 때 보는 중요한 것으로 붓과 벼루가 함께 있었다. 역리(譯吏)를 아시는 어른으로 주민들의 사주나 택일, 작명을 해 주셨다. 풍수 일 때문에 쇠(휴대용 방향 측정 기구)를 갖고 나가시는 날이면 막걸리도 한 잔씩 즐기셨다.
밤이 되면 우리 집 사랑방에 동네 일꾼들이 모여 농사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볏짚 작업을 한다. 다가오는 농사철에 사용할 각종 소품이나 재료 등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니 사랑방의 일꾼들은 볏짚 예술을 창작해 내는 훌륭한 공예가들이셨다. 가마니 짜기는 하루 이틀 정도면 되지만 덕석은 겨우내 작업해야 완성할 수 있다. 쉽지 않은 일이므로 끈기로 이겨내야 하며 손은 굳은살로 거칠어진다.
볏짚은 길이가 길고 줄기에 붙은 잎들이 가지런해야 한다. ‘통일벼’ 볏짚은 키가 작고 푸석거려 가공 재료로서는 좋지 않다. ‘아끼바레’ 볏짚이 좋은데 농사가 잘되면 줄기도 길고 탄력이 있어 더 좋다. 적당한 크기로 묶어 물에 담갔다가 아랫부분을 나무망치로 두들겨 부드럽게 한다. 줄기에 붙은 협잡물들은 손으로 미리 훑어내야 본 작업이 편하다. 볏짚 공예의 기초는 새끼 꼬기이다. 숙련도에 따라 작업 속도가 차이가 난다.
가마니 틀은 일본인들이 우리 쌀을 수탈해가고자 도입한 것이라 한다. 일제 강점기 때 가마니에 쌀을 담아 군산이나 목포항에서 조상님들의 피와 땀을 빼앗아 갔다. 가마니에 얽힌 슬픈 사연이다. 가마니 틀은 두툼한 네모의 받침목에 두 개의 기둥을 세워야 하므로 방이 커야 설치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작업해야 하며 날줄을 엇갈리게 한 그 사이에 바늘대에 볏짚을 걸어 넣고 보디로 힘차게 눌러 짠다. 베틀에 천을 짜는 원리와 같은 방식이다. 겨울철에 집집마다 가마니 짜는 소리가 쿵덕쿵덕 정겨웠다. 요즘은 민속 축제나 전시회에서나 볼 수 있는 조상들의 유품이 되었다.
덕석은 곡식을 널어 건조하는 농촌에 긴요한 깔판이었으므로 덕석 짜는 것 역시 중요한 사랑방에서의 일거리이다. 혼자서 짜야하니 꾸준한 인내심으로 작업해야 한다. 덕석 위에 곡식을 말리면 건조가 빠르고 친환경적이어서 좋으나 무거워서 불편하다. 가을걷이가 마무리되면 둥글게 말아서 헛간에 보관해야 한다. 그런데 겨울 동안 쥐들이 덕석 안에서 집을 짓고 새끼를 기르면서 덕석에 구멍이라도 내면 참으로 난감하다. 어르신들은 쥐들이 낸 구멍을 이듬해 가을 다시 꿰매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초가집은 볏짚을 엮어서 지붕을 얹는다. 할아버지께서는 매년 이엉을 엮어 올리셨다. 초가지붕이 오래되면 서까래가 앙상하게 드러나므로 짚을 새로 올리는 일은 중요한 연례행사였다. 가을이면 박 넝쿨이 지붕 위에 타고 올라 조랑박들이 탐스럽게 매달렸고, 감을 깎아 지붕 위에 말리면 꿀맛 같은 곶감이 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초가지붕은 슬레이트나 함석 또는 기와로 차츰 개량되었다.
어린 시절의 사랑방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고 정(情)이었다. 이제는 사랑방은 사라지고 마을회관에 노인정이 들어서 어르신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마저도 요즘엔 코로나 때문에 모일 수도 없다. 유년 시절 시골집 사랑방 풍경은 사라졌지만 우리 동네 고향 냄새, 할아버지 담배 냄새, 일꾼들의 땀 냄새와 구수한 옛날이야기, 쇠죽 끓이는 냄새는 가슴 깊이 서려 있다. 사랑방은 어린 시절 아름다운 추억의 산실이었고, 정겨운 이름 때문에 노년기에도 사랑방을 다시 생각한다.
할아버지께 책 읽어드렸던 큰 형님은 아나운서가 되어 지금도 방송국에서 일하신다. 사랑채는 무너졌고 그 자리엔 목련나무가 옛 추억을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