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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버린 내 고향과 초등학교

마음속의 고향 이야기

by 노고지리

언제나 그립고 정든 곳이 고향이다. 계절마다 신비롭게 변하는 자연과 함께 흙과 물과 햇볕과 신선한 공기를 누리며 사는 건 신의 축복이다.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외평 마을은 ‘밭들’이라고도 했다. 지리산 줄기 정령치에서 내려다보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들이 산 따라 옹기종기 자리했고, 그 중심부 넓은 터에 밭들 마을이 있다. 마을 윗편 나지막한 산줄기에 ‘바드리 평전’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수백 년간 묻혔던 토기가 발굴되어 가야시대부터 조상들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 깊은 고장이다. 이곳에서 호경 마을 쪽으로 오르면 육모정이 있어, 구룡 계곡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산과 구름과 폭포가 절경을 이룬다. 어른들은 지리산의 정기를 받은 명당의 터로 예로부터 어진 사람들이 살아오던 곳이라 하였다.


한국 향토문화대전에서는 외평들의 대부분이 밭으로 구성되어 ‘밭들’이라 하였고, 그 위치가 장백산 안쪽에 있다 하여 ‘장안리’라 칭하였다. 본 마을은 500여 년 전 채 씨와 정 씨가 먼저 정착했고, 그 후에 노 씨, 김 씨 등이 자리 잡으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전라남도에서 교사이셨던 아버지는 6.25 전쟁 피난처로 이 마을에 정착하셨다. 일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원천 초등학교를 다녔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남원으로 진학하였다. 이곳이 나의 고향이다.

1979_두리봉에서_내려다_본_밧들__ICT0029_000_adjusted.jpg 두리봉에서 내려다본 장안리 밭들마을

밭들 마을은 주천면 소재지로, 마을 중심에는 다섯 방향의 길이 모이는 곳이라 하여 ‘오거리’라 불리는 곳이 있다. 면사무소, 원천 초등학교, 우체국, 정 씨 가게, 목수셨던 장 씨 세 점 빵, 정 씨 한약방, 담배 집, 방앗간 그리고 막걸리 주조장까지 인근에 모여 있던 곳이다. 180여 호의 큰 마을로 무수동, 용궁, 호경 마을 사람들까지도 수시로 드나들었다. 초등학교 때 전깃불이 처음 들어왔고, 중학교 시절엔 남원에서 시내버스도 다니기 시작하였다.


오거리에는 김 의사라는 분도 사셨고, 방앗간도 있으며, 이발소도 있어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몸이 약했던 나는 흔히 찾던 곳이 학교 앞 정 씨 어른 한약방이었다. 방에 들어가면 여러 약초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천정에는 색이 바랜 종이봉지에 알 수 없는 약재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한쪽 벽면에는 세워놓은 바둑판같은 수많은 서랍장 속에는 신비스러운 약재들이 숨어있었다. 팔자수염을 하셨던 약방 어르신은 귀엽게 생긴 작두칼에 마른 약초들을 정성스레 썰어내셨다. 잘게 잘린 약재들을 하얀 종이에 싸서 다섯 봉지씩 부드러운 끈으로 엮어주셨다. 어머니가 다려주신 약사발의 씁쓰름하면서도 달콤 새콤 한 맛을 보약이라 생각하며 마셨다.

20220105_142905.jpg 우측 노변으로 면사무소가 자리잡았다.

우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어수선한 데다, 초등학교 교실이 모자라 면사무소 회의실이나 다리 밑이나 정자나무 밑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나는 12회로 졸업했고, 우리 집 7남매 모두가 동창생이 되었다. 졸업한 지 50여 년이 지났어도 교가는 잊히지 않는다.

‘영제의 높은 봉은 구름을 뚫고

원천의 폭포수는 용을 이루니

역사를 자랑하는 이 고장에서

아담히 자리 잡은 우리의 터전

장하다 그 이름 원천 학교다.‘

가사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터에 자리한 자랑스러운 학교라는 노래일 것이다. 넓은 운동장은 600명 학생들의 놀이터였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꿈을 키웠다. 운동회 때는 하늘에 만국기가 휘날리며 청군, 백군 응원소리에 학교가 들썩거렸으며, 면민들 잔칫날이었다.


매년 봄이면 우리는 호경 마을을 지나 육모정으로 소풍을 갔다. 신작로 길을 줄지어 걸으며 흐르는 물과 푸르른 하늘과 구름과 들꽃의 자연 속에 빠져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구룡 폭포에서 수백 년간 흘러내린 거센 물줄기는 육모정 너럭바위를 파고들며 깊은 물길을 만들어 냈다.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물의 흐름은 변함이 없으며 많은 사람들은 지리산 맑은 공기와 푸른 물에 힐링을 즐기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졸업식장은 기쁨과 서러움이 범벅이 되는 시간이었다. 교장선생님의 졸업장 수여와 훈시말씀에 이어, 후배들이 졸업식 노래를 불러주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졸업생들은 숙연한 분위기에 눈물을 참으며 노래를 이어갔다.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못했던 아이들은 서럽게 울어버렸다. 어린아이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큰 가슴의 상처였다. 차라리 2절은 부르지 말았어야 했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납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졸업식을 생각하면 눈물이 맺힌다.

20220105_141119.jpg 오거리 방앗간자리는 전원주택이 들어섰다.

소재지 마을은 많이 변했다. 동네 아래쪽으로 4차선 큰 길이 새로 뚫려 도로 따라 면사무소, 파출소, 농협 등 정부기관이 자리하여 과거 오거리는 구시가지가 되었다. 남원에서 밭들을 거쳐 육모정과 지리산 정령치까지 연결되며, 소재지에서 전라남도 구례로 넘어가는 길로도 통한다. 근래엔 지리산 둘레 길의 시발점이 되어 사람들이 연중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다른 동네와 달리 주민 수가 늘어나면서 도시처럼 변하고 있다. 땅값도 올랐다.


수십 년 객지에서 돌아와 보니, 정들었던 고향은 옛말이 되고 말았다. 많은 것이 변했고, 옛 분들은 보이질 않으시다. 이웃 간의 따뜻한 정이 사라지면서 삶이 각박해졌다. 시원스레 뚫린 아스팔트 도로엔 미끈한 자동차들이 바람처럼 달린다. 학교 운동장은 건물이 들어서 좁아졌고, 잔디밭으로 변하여 고요하다. 장안리 넓은 들은 트랙터가 갈고, 이앙기로 벼를 심고, 콤바인이 수확한다. 사람이 발 벗고 논에 들어갈 일이 없어졌다. 밭은 경운기가 갈고, 관리기가 비닐까지 쳐주는데, 수확은 손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밭농사에 시달린 어르신들 허리는 새우등처럼 굽어버렸다. 감나무 위 까치소리, 돌담 밑 도랑물 소리, 외양간 송아지 소리, 아기들 울음소리가 그립다. 잡초 무성한 오솔길을 걸으며 흙냄새를 맡고 싶다. 구불구불 자갈길을 달리며 연도 날려보고 싶다.

세상을 살아보니 학력은 중요치 않았다. 공부 많이 했다고 모두가 성공한 것도 아니었고, 진학을 못했다고 실패한 인생도 아니었다. 오히려 산과 들을 마음껏 뛰놀며 자연을 사랑할 줄 알고, 부모님과 땀 흘리며 노동의 가치를 일찍 깨우쳤던 아이들이 성공한 사례가 더 많았다. 가진 것이 많든 적든 내 분수에 만족하며 즐겁게 사는 것이 중요했다. 누구나 이승에서 잠시 머물다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면 그만인 것을, 남에게 빚지지 않고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다면 그것이 성공한 인생 아닐까.


고향이 그리워 힘들거든 가만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보라. 주마등처럼 살아나는 기억으로 나는 위안을 삼았다. 머릿속 도서관엔 추억의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우리가 꺼내보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그리던 옛 모습은 사라졌어도, 시대의 흐름과 함께 고향은 꿈틀거리고 있다. 서울이든, 일본이든, 미국에서든 물 맑고 산 좋은 내 고향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라. 간절히 그리워하며, 가슴 설레며, 고향땅에 다시 안길 날을 기대해 보라. 당신의 고향은 멋지게 변신하고 있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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