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시도에게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알지? 성경에 나와있는 이야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던 사람이 길에서 강도를 당했어. 그는 돈도 잃고, 옷이 찢기고, 반쯤 죽었지.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어. 하지만 지나가던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상처를 치료해 주고, 여관까지 바래다주고,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며 보살펴 달라고 했어. 예수께서는 누가 그 다친 자의 이웃이냐고 유대인들에게 물었지.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유대인들에게는 존경받는 지위의 사람들이야. 반면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에겐 경멸과 증오의 대상이야. 마치 그들의 관계는 지금으로 치면 이스라엘과 하마스/헤즈볼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우리로 치면 일제강점기 때의 한국인과 일본인 정도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아. 즉, 서로의 실패를 고대하고 있는 사이?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위선적인 목사님들이나, 교인들을 꼬집어 비판할 때 자주 인용되기도 해. 그렇잖아. 제사장과 레위인은 현대의 목사님과 그리스도인들이니까. 그들은 겉으로 거룩해 보이지만, 실제에선 남들을 돕지 않았어.
1970년대 한 사회심리학 실험에서도 이런 점을 꼬집었어.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한 실험인데, 피실험자들에게 모두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설교를 준비하도록 했어. 단, 무작위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설교가 급하다고 이야기했고, 어떤 사림들에게는 설교할 때까진 시간 여유 있다고 이야기했어. 그리고 피실험자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옆 건물로 이동하는 것을 권했지. 그리고 그들이 이동하는 경로 중간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만나도록 했어. 피실험자들은 그 사람이 연기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어.
연구자들은 누가 그 사람을 돕는지 관찰했어.
어땠을 거 같아? 일단 기억해야 할 건, 모두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련된 설교를 부탁했다는 거야. 그러니까, 모두 어려움에 처한 남들을 도와야 한다고 남들에게 전해야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거지.
누가 더 많이 도와줬을까?
설교가 급박하다고 일러준 신학생들은 그 사람을 도우려 하지 않았어. 좀 위선적으로 보이지?
반면에 설교까지 여유가 있다고 일러준 신학생들은 그 사람을 도울 확률이 높았어.
결론은, 아무리 신학생이라도 남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아. 중요한 건 여유야. 그중에 시간적 여유.
신학생들이 돕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위선적이라기보다 여유가 없었던 거지.
아빠는 너희가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 특히 시간적 여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은 도움을 요청하러 오기 쉽지 않아. 자존심도 상하지.
도와달란 요청이 거절당하면 어떻게 하지?
그런 걱정을 한단 말이야. 너희도 어려움에 처할 때 그럴 수 있어.
그러니 너희가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때가 있을 거야. 그런 생각을 가지려면, 시간적 여유를 만들렴. 일주일에, 하루에, 일로 바쁘더라도, 언제든지 하던 일을 멈추고 남들을 도울 준비를 할 수 있어야 해.
그런 여유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너희에게 주어진 일을 다 하고도 시간이 남을 만큼 너희가 충분한 능력이 있어야 해.
높은 기준이지.
그니까 다른 사람도 섬기며 살려는 사람은 힘들어. 아빠는 그 기준에 도달하려 노력할 거야.
너희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