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행을 준비하며 여러 블로그를 서핑했다. 출국 4개월 전이었다. 지독한 가성비족인 나는 행여라도 싸고 좋은 숙소를 나보다 더 지독한 가성비족들에게 빼앗길까 안달복달하고 있었다. 그러다 사진 한 장을 보았다. 수많은 블로그를 파도 타듯 타고 또 타다 들어간 어느 블로그에서였다.
'미친 여기 어디야?!'
흔히 흥분했을 때 그러하듯, 그 사진을 본 내 입에서는 거친 언어가 튀어나왔다. 모르긴 몰라도 콧구멍에서 김도 나왔을 것이다. 자석에 이끌리듯 블로그 포스팅을 다시 올려 보았다.
사진 속 장소는 론다(Londa)의 누에보 다리였다.
블로그 주인은 누에보 다리를 1열에서 관람할 수 있는 숙소를 소개했다. 그러니까 그 숙소에 가면, 누에보 다리를 보면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곧바로 숙소 정보를 검색하면서 가슴이 떨려옴을 느꼈다. 저 정도 뷰의 숙소는 보통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다. 가성비족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말이다.
'제발 비싸지 마라. 제발 비싸지 마라.' 나는 거의 주술을 걸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숙소의 가격은 30만 원이었다. 하. 30만 원이라니. 하룻밤에 30만 원이라니! 손이 작은 걸로 유명하고(물리적인 손은 크다.), 간땡이에는 붓기가 하나도 없으며(물리적인 간은 지방간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심장도 콩알만 한(물리적인 심장은 아직 젊으니 크기엔 문제가 없으리라 믿는다.) 나에게는 그게 너무 비싼 가격이었다. 게다가 30만 원을 냈더라도 1열 뷰가 확실히 보장된 것도 아니었다. 웃돈을 주고 업그레이드를 해야만, 그나마 기대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30만 원.. 30만 원.. 가격이 나를 못살게 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성비족은 대체로 자기만의 철학이 있는 경우가 많다. 또, 아무리 가성비족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저걸 어떻게 포기해? 난 못해.' 하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결제 버튼을 눌렀다.
막상 거금을 치르고 나니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리뷰 방을 얻어내는 것! 여행객들의 후기를 찾아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래의 3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1. 최대한 빨리 예약하기
2. 숙소에 메일 보내기
3. 체크인 빨리 하기
1번은 그럭저럭 빨랐다고 생각했다.
다음 2번. 나는 챗지피티를 이용하여 최대한 예의 바르고, 간곡하고, 간절한 이메일을 작성했다. 누가 보면 로또 번호라도 알려달라고 하는 줄 알 정도의 간절함이었다. 하지만 숙소로부터 받은 답장은 확신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자주 받아본 이메일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3번. 3시 체크인 시간을 맞추기 위해 일정을 수정했다. 체력적으로 무리였지만, 다리뷰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30만 원을 냈는데 이것쯤이야 후후.
마지막으로, 여행객들의 후기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제일 중요한 일이 남았다. 사실 이건 내가 만들어낸 것인데, 이게 제일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제일 자신 있는 것이기도 했다.)
4. 행운을 빌기
나는 틈만 나면 "제발 누에보! 제발 다리뷰!"라고 외치며 여행 메이트를 질리게 했다. 미안..
한여름의 스페인. 그날 아침엔 알람브라 궁전을 둘러보았다. 장장 4시간이나 걸리는 일정이었다. 워낙 볼거리가 많았기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뒤로한 채 서둘러 론다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눈을 뜨니 기차는 론다역에 도착해 있었다. 역에서 숙소까지는 도보로 15분 걸렸다. 가는 길에는 이상하게 개똥이 많았다. '스페인은 개들이 길에서 똥을 싸도 과태료를 물지 않나 보네?' 그런 생각들을 하며 걸었다.
곧이어 숙소에 도착했다.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프런트의 여성 호텔리어는 반갑게 인사했다. 나는 그녀에게 "제발 누에보 다리뷰 방을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저희 숙소가 너무 인기가 많아서요.. 제가 뭘 해드릴 수가 없네요."라고 답했다. 나는 4개월 전 누에보 다리 사진을 발견했을 때와 똑같은 거친 언어가 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참음으로써 어글리코리안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키를 건넸다. 125호였다. 캐리어를 끌고 125호로 향하는 길, 나는 속으로 별의별 "왜 그렇게?"들을 떠올렸다. 0층에서 1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왜 그렇게 느린지, 1층은 또 왜 그렇게 넓은지, 125호는 왜 그렇게 멀리 있는지... 수많은 "왜 그렇게?"는 내가 긴장했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그 많은 신호들 끝에 내게 선사된 125호의 뷰는... 두근두근...
누에보 다리 1열 뷰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누에보 다리는 알람브라 궁전과도, 사그라다파밀리아와도 견줄 수 있는 극한의 아름다움이었다. 그 오래된 다리에서 행해졌을 수많은 역사들이, 연인들의 오래된 사랑 고백들이, 분명히 있었을 이름 모를 슬픈 죽음들이 시속 1200km로 달려오는 기분이었다.
나는 어린아이가 된 것 마냥 폴짝폴짝, 방방하며 날뛰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소리도 질렀던 것 같다. 그건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순도 100%의 진짜 행복이었다. 얼마간의 놀람과 감탄과 행복에 겨운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방금 막 순수함 뿐이었던 유년 시절로 잠시 돌아갔다 왔다는 것을 말이다. 크리스마스 새벽, 살금살금 방에 들어와 선물을 몰래 놓고 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실눈으로 바라보았던 어린 날의 기쁨. 체험학습 가는 날 아침, 엄마가 말고 있을 김밥 냄새를 맡으며 일어났던 설렘. 한 달을 졸랐던 강아지를 품에 안고 집에 들어왔을 때 느꼈던 벅차오름.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반짝이는 색채들. 그 감정으로, 그때의 그 순수함으로 다시 돌아갔다 온 것이다.
어쩌면 나는 누에보 다리뷰를 배정받은 것보다 내가 간절히 원했던 무언가가 이루어졌음에 더 큰 행복을 느꼈던 것 같다. 가성비족이 30만 원을 날려먹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1번부터 4번까지 마음을 쓰고, 애태웠던 것이 결국 성취로 이어진 것에 감격한 것이다.
어린 시절엔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졌다. 갖고 싶은 인형이 생기면 엄마를 조르고, 계단을 올라가기 힘이 들면 아빠를 졸랐다. 그러면 엄마가 인형을 사주고 아빠가 나를 안아 들었다. 학생 시절엔 열심히 노력하면 이루어졌다. 친해지고 싶은 친구에게 관심을 쏟고, 목표한 대학을 위해 노력하면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어른이 되니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애를 쓰면 쓸수록 오히려 내게서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사람이 그러했고, 사랑이 그러했으며, 이별이 그러했다. 특히 이별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고, 유능하다는 모든 신들에게 아무리 빌고 또 빌어도 미룰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 성숙이란 체념의 다른 말일뿐이었다.
그랬던 내게 론다에서의 경험은 실로 오랜만에 느낀 감각이었다. 운 좋게 숙소 하나 잘 걸린 거 가지고 뭘 그렇게까지..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겐 '나도 행복하기만 했던 적이 있었지.' 라거나 '가끔은 내 노력이 통할 때가 있었지.' 하는 생각들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건 아무리 큰돈을 주더라도 느끼기 어렵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큰 맘먹고 결재한 30만 원은 올해 가장 뜻깊은 소비 중 하나가 되었다. (아무튼 지간에, 가성비족이라 하더라도 대체로 자기만의 철학이 있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나는 이날의 감각을 기억하려 한다. 어른이 되었더라도, 영혼의 자유와 성숙을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유년 시절의 순수함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때 묻지 않은 행복과 자기 효능감, 혹은 엇비슷한 무언가들은 다신 돌아갈 수 없는 영영 먼 과거가 아니다. 조금의 운이 더해진다면 언제든 또다시 느껴볼 수 있는 감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