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보면 유일무이한, 최고의, '단 하나'가 생기리라.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그만의 작가적 특징이 몇 가지 있다. 절대 어려운 말로 쓰지 않는다는 것, '갑자기? 여기서? 이렇게 길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흐름과 관련 없는 내용을 원하는 만큼 길게 쓴다는 것, 그리고 야한 장면은 필수라는 것 등이 있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특징은 '썼던 것을 또 쓴다.'는 것이다.
하루키의 장편 소설을 읽다보면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든다. '착각인가?'하는 마음에 책장에 꽂힌 낡은 하루키 단편집을 꺼내들면 '아 역시.'하게 된다. 그만큼 하루키는 썼던 글을 다시 쓰고, 고쳐 쓰고, 새로 쓰는 작법을 애용한다. 일례로, 출간된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그보다 한참 전에 출간된 <반딧불이>와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대부분의 작가가 자기 복제적인 글을 쓴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쓴 밀란 쿤데라도 평생동안 자기 복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 창작자라면 다 비슷하지 않은가. 유명 싱어송라이터, 유명 화가들도 언제나 자기 복제적인 창작물로 질타를 받거나, 응원을 받는다.
나는 주로 응원하는 대중이다. 창작자의 자기 복제는 필연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창작이란 작은 물방울들이 모이고 또 모여 하나의 커다란 물웅덩이가 되는 과정이라 믿는다. 다시 말해 무수히 많은 비슷한 글을 쓰다보면, 비슷한 음악을 만들다보면, 비슷한 그림을 그리다보면 보면 언젠가 유일무이한 '단 하나'가 탄생하게 될 것이다. 그 무수히 많은 결과물들이 자기 복제라는 말로 질타를 받더라도 기어코 말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브런치에 글을 쓴다. 무수히 많은 글을 쓴다. 썼던 것을 다시 쓰고, 고쳐 쓰고, 새로 쓴다. 자기복제적인 글이라 하더라도, 아무도 읽어주지 않더라도 그렇게 한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커다란 물웅덩이 하나가 내 안에 생기리라. 유일무이한, 최고의, '단 하나'가 생기리라.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러했듯, 밀란 쿤데라가 그러했듯 말이다.